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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래 Jun 20. 2019

뉴욕 기록

3

책을 가져왔어야 했다. 책 내용이 워낙 네거티브한 지라 공원에서 읽기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 들고 나오지 않았는데 공원에 앉아서 햇빛을 받고 있으니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누군가의 글이 읽고 싶어 졌다.
오늘 메트로폴리탄 손절하고 냅다 센트럴파크를 온 건 신의 한 수였다. 뉴욕에 온 지 3일 만에 따뜻하고, 햇빛이 비치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씨였다. 실내에서, 그것도 죽은 것들과 시간을 보내기에 너무 아까운 날인 것이다. 안 그래도 LA를 떠나온 이후로 줄곧 그곳의 날씨를 그리워하고 있던지라 고민 없이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사들고 센트럴파크로 와버렸다.
아- 얼마나 좋은지. 추우면 신체활동을 멈추는 변온동물처럼 지난 3일간은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자꾸 멈춰서 생각하고, 가성비를 따지고, 기대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욕했다. 여행 전 날이 서있던 그 상태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만사가 귀찮고 의욕 없으며 재미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공원에 앉아 몸을 데우니 마음까지 같이 데워지는 듯하다. 여유와 낙관적인 생각을 되찾고 있다. 와중에 혼자 피식한 것은, 날씨가 워낙 건조한 탓에 태양이 있는 방향을 몸으로 알 수 있다. 별 건 아니고, 날이 습하지 않아서 딱 정직하게 햇빛을 받은 쪽은 뜨겁고 응달은 차가워진다. 지금도 왼쪽은 뜨끈 거리고 오른쪽은 서늘하다. 습기 때문에 동서남북이 같이 달궈지는 우리나라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몸 안에서의 온도차가 생경하면서 즐겁다.
재밌는 건 나라마다 공원들이 서로 다른 특색을 지닌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볼로뉴, 일본의 리쓰린, 미국의 센트럴 세 개 모두 거대한 시민공원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 이 와중에 여의도 공원을 안 가본 나는 대체 무엇인가ㅋㅋㅋ - 공원 조성이 일종의 인공 유토피아의 조성이라는 맥락에서 각국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상이하다는 짐작을 해 볼 수 있다. 일단 리쓰린은 가장 다른 종류의 공원이다. 그야말로 인간이 ‘가꾼’ 공원으로 나뭇가지의 방향, 잎의 풍성한 정도, 심지어 낙엽이 쌓인 높이까지 어느 것 하나 인간의 의도가 담기지 않은 것이 없다. 일본 정원의 개념이 커진듯한 공원이다. 거칠고 위압적인 자연환경을 가진 일본은 아무래도 자신의 손으로 컨트롤 가능한 범위의 예쁜 자연을 유토피아의 모습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혹자는 인위적이라 욕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일본의 지진, 태풍, 해일을 뉴스로 한 번이라도 접해봤다면 거칠지 않은 자연에 대한 일본인들의 욕구를 대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볼로뉴와 센트럴은 공원 자체만 놓고 보면 비슷할 수도 있다. 자연스럽게 자란 나무와 풀들은 저마다 싱그럽게 빛나고 사람들은 아무 곳에나 누워 자거나 이야기하거나 운동을 한다. 하지만 볼로뉴는 파리 외곽에, 센트럴은 맨해튼의 최중심부에 위치한다. 이는 사실 둘의 탄생부터 놓고 봐야 할 것이다. 볼로뉴는 본래는 숲이었던 곳을 사람이 다닐 수 있게끔 정리한 것에 가까운 공원이다. 센트럴파크는 채석장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건 나의 뇌피셜인데 농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속칭 ’땅의 기억’을 소중히 하는 파리 사람들에게는 숲-공원의 과정이 훨씬 이상적인 것이고 개척민의 나라 미국은 이제는 쓰이지 않는 옛것을 새롭게 탈바꿈하여 시민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이 유토피아스럽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 공원의 차이점은 흥미롭다. 그리고 따뜻한 풀밭에 누워 이런 잡생각에 잠기는 것은 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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