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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마켓’이라고 간단히 표현한다면 멜로즈 트레이딩 포스트에게 실례하는 것 같다. 물론 플리마켓의 형태를 하고 있는 만큼 판매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1997년부터 지속되었고 지속된 시간만큼 지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이것을 특별하게 만든다. 페어팍스 고등학생들은 벼룩시장을 통해 직업 및 생활기술을 체험하고 소매업자들에게는 창업과 보육센터 역할을 겸한다. 또한 멜로즈 뮤직 시리즈를 비롯한 연극, 춤 등 이벤트로 가득 찬 곳이다. 무척 건강한 형태의 플리마켓이 아닐 수 없다. 버스킹 하는 곳 앞에서 햇빛을 피하면서 차가운 음료를 마시면 삶의 질이 수직 상승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비단 멜로즈 트레이딩 포스트 말고도 멜로즈 거리 주변이 전부 빈티지 마켓이 넘쳐난다. 내가 묵고 있는 할리우드 쪽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고등학교가 주변에 있는 만큼 좀 더 젊은 거리라는 인상을 준다. 또 하나 괄목할 만한 것은ㅋㅋㅋ 엘에이 밷걀들은 여기 다 오는 것 같다ㅋㅋㅋ진짜 다들 엄청 작은 천 조각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데 세상에 우리나라에서는 휴양지에서나 입을 법한 패션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길거리를 돌아다닌다. 하긴 근데 여기 날씨를 보면 이런 옷차림이 맞긴 하다. 글을 쓰는 지금은 조금 시원해졌지만 한두 시간 전에는 28-29도까지 올라갔으니 시원하게 입는 것이 좋겠지. 신기한 한편 내가 뭘 어떻게 입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가 부럽다. 또한 몸이 어떻든 -뚱뚱하든, 마르든 - 입고 싶은 옷은 입는다는 것이 인상 깊다. 배울 점이라 생각된다.
항상 뭐랄까, 계획했던 대로 여행을 안 하는 것 같다. 원래도 그런 경향이 강했지만 혼자니까 진짜ㅋㅋ 지 멋대로 한다. 귀찮아서 안 가기도 하고 그날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안 가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어제. 계획했던 산타모니카는 때려치우고 갑자기 UCLA를 가질 않나, 또 버스가 타기 싫어서 전동 킥보드를 타고 거의 7km를 달려 버벌리 힐스까지... 동행자가 없으니 이런 건 편하다.
이 전동 킥보드가 또 요물이다. 미국은 분명 걷기에 힘든 나라가 맞는 것 같은데 -적어도 LA는 - 바퀴 달린 걸 타는 순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걷기에 지루하고 오래 걸리는 거대한 격자형의 길은 전동 킥보드를 타고 빠르게 달리기엔 최적화되어있다. 골목길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 같은 길치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또 햇빛은 따갑지만 건조하기 때문에 킥보드를 타고 바람을 맞는 순간 땀이 빠르게 식는다. 여러모로 킥보드를 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돈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가끔 그냥 우버 타는 것이 더 쌀 때도 있다. 골목길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공유 전동 킥보드 시스템이 도입되기 힘들 것 같지만 그래도 한번 바래본다.
여기서 또 놀라운 것은 강아지들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닌다. 백화점, 음식점, 오늘 같은 벼룩시장에도 데리고 온다. 이것이 놀라운 게 아니라 강아지들의 성숙이 놀랍다. 얘네들이 어려서부터 산책을 비롯한 바깥 경험이 많아서인지 쉽게 놀라지 않고 떼를 쓰지 않는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데도 짖는 걸 본 적이 없다. 강아지도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만 있을 때에는 강아지의 사회화라는 개념을 잘 이해 못했는데 아마 사회화된 강아지라는 건 이곳의 강아지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오늘이 일주일 차다. 첫날을 비행으로 버리긴 했으나 날짜 상으로는 꽉 찬 7일인 셈. 그 사이의 변화를 적자면,
덜 냉소적으로 변한 것 같다. 지난 몇 달간 알바에 사람에 계속 치여 살았던 터라 나도 모르게 모든 일에 들어가는 나의 에너지를 셈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일을 하고 싶지만 그 일을 하려면 들여야 하는 노력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나의 체력적 로스를 계속 따져왔던 지난날과는 달리 내키면 그냥 하는, 가성비 제로의 여행을 하고 있는 터라 자연스럽게 날 선 감정이 무뎌지는 느낌이다. 치밀하게 계산하고 정한 여행지보다 그냥 무작정 갔던 이름 모를 공원에서 한참 햇빛을 받으며 행복해했던 날 이후로 사람이 좀 더 말랑말랑해지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온전히 나를 위해 주어진 시간에 익숙해진 느낌이다. 처음 며칠은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의견을 묻지 않고, 허락을 받지 않고 진행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하지만 이제는 나의 선택이 오롯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에 조금은 길이 들은 것 같다. 갑자기 ‘아 오늘은 고기 좀 썰어봐야지. 이왕 미국까지 왔는데’라고 느껴서 왕창 돈을 몰아 쓰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는 거다. 설사 그 이전까지 음식 별로야, 라면서 매끼를 깨작대며 보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의견을 묻는 사람 없고, 대답하는 사람 없고. 오직 내가 생각한 것을 실행하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만이 있는, 그런 여행이다. 나를 살뜰히 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건져줄 사람 없이 침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 일주일뿐인 감상이니 3주 뒤에는 어떠한 내가 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여유가 있는 날은 첨언할게 넘친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이 책을 가져온 게 잘한 걸까. 낮에는 비교적 충만의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 상실에 대한 것. 결국 뭐가 되었든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섬이 되는 건가ㅋㅋ
그리고 무섭게 타고 있다. 더위에 못 이겨 -라고는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싸매고 다닐 순 없지란 생각에 - 연이어 민소매를 입었더니 어깨랑 뒷목이 화끈거려 미치겠다. 나름 끈적거릴 정도로 선크림을 바른 건데. 구릿빛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