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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래 Apr 27. 2019

LA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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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일간의 회고도 안 했고, 산타모니카도 아직 안 갔지만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기록한다.
게티... 와 게티... 리처드 마이어 이 악마의 재능.... 거장이라는 수식어는 아무에게나 붙는 게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 케이스다. 트램을 타러 가는 길부터 입구, 정원 뭐 하나 놀라지 않은 곳이 없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고급스럽고 세련됐다. 매스에서 느껴지는 힘부터 치밀한 난간 디테일까지 감탄과 경악의 연속이다. 심지어 먹고 있는 머핀을 다 먹고 당이 충전된 상태로 이 곳을 돌아본다면 아마 나의 평가(라고 하기에는 넋 놓고 감상 중이긴 한데)는 더욱더 찬사에 가까워질 것 같다. 내가 지나온 동선에 따라 하나하나 적어보자면,

트램을 타고 올라오는 길은 높이의 축복이다. LACMA는 그 주변은 공사 중이었고 시내 한복판에 있어 이르는 길이 감동적이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산 위에 있는 게티는 트램을 타고 올라오는 길 내내 LA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시내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그림 같은 하늘 아래에 있었다. 아 정정하겠다. 높이와 기후의 축복이다. 한국은 높은 습도로 이런 가시거리가 확보되지 않을뿐더러 최근엔 미세먼지 때문에 더욱 멀리 보기 쉽지 않다. 또한 하늘 또한 예의 그 ‘쪽빛’을 띄는 날이 손에 꼽으니 같은 높이가 한국에서 갖추 어진들 같은 감동이 있을 리 만무하다. 세계 최대의 폐기물 생산국에서 이런 천혜의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묘한 기분이다.

게티센터는 몇 개의 동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동은 분절된 느낌보다는 하나의 매스 감을 형성한다. 트래버틴..?으로 보이는 미색의 패널은 거친 질감을 하고 있고 매끈한 대리석 패널이 이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수장고는 트래버틴, 동선 및 기타 연구실은 대리석으로 표현한 것 같다. 핀터레스트에서나 보던 퀄리티의 마감을 실제로 보니 생경하다. 사진을 찍어도 렌더 같이 나오는 건 분명 이 깔끔한 시공이 한 몫했다. 정사각형의 모듈을 사용했는데 입구의 홀을 제외하고는 조형 또한 사각형을 하고 있다. 촘촘한 격자가 연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답답하지 않은 건 설계자의 역량에 돌려야 할 것이다.

입구 홀은 원기둥 형태를 하고 있다. 원기둥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천창이 있다. 그리고 그 천창 아래에는 경사가 완만한 계단이 있는데 여길 천천히 오르며 보는 홀의 모습이 걸작이다. 입구 홀 곳곳을 둘러보며 느낀 것은 의미 없이 뚫은 창이 하나도 없다는 것?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채광을 위한 부분은 창에 요철을 만들어 밖이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 테라스, 창, 문의 방향 모두 뒤에 펼쳐질 중정을 향해 있어 그곳을 향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일단 중정을 모서리에서 보게 한다. 입구 홀과 중정은 일직선 상에 있음에도 중정으로 난 문을 모서리로 내었다. 그 덕분에 어느 문을 이용하든 한눈에 중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중정에는 분수와, 나무와, 벤치. 이렇게 쓰고 보니 참 특별할 것도 없는 조합인데 색, 디자인, 햇빛, 바람이 여길 이토록 특별하게 만든다. 여긴 당장에 커피를 사들고 햇빛을 받으면서 쉬게 만든다. 여유를 경험하게 만든다. 생각을,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만든다. 점점 더 드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멍 때리게 만드는 공간이 좋은 공간 같다.

마이어는 높이차를 천천히 경험하길 바란 듯하다. 외부와 맞닿은 계단은 거의 램프에 가까울 만큼 완만하다. 그 덕에 힘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다음 층으로 가게 되는데 그 시간은 환상적인 바깥의 풍경을 보느라 무척 짧게 느껴진다. 외부와 조응한다는 것은 이런 것 같다. 천천히 이를 감상할 기회를 주는 것

참 이 곳이 좋으면 좋을수록 마이어의 개인 추문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존경받는 건축가지만 존경받을 인간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순결하고 고결한 백색의 건축을 하는 사람이 개인사는 지저분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난센스다. 참 무서운 것 같다. 개인의 영광은 미성숙과는 상관이 없다. 앞으로 그의 건축을 보기 힘들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이미 만들어진 그의 마스터피스는 이렇게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줄 것이다. 이 벅참을, 떨림을 부정해야 할지 그냥 온전히 느껴야 할 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겠다. 도의적으로 잘못한 일을 한 가수의 노래를 불매 운동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렇다면 건축가는 어때야 할까. 아니 비단 건축가뿐 아니라 그 사람이 만들어낸 피조물이 시간을 넘어 지속될 수 있는 종류라면 그것의 감상은 개인의 도덕적 결함과는 별개의 것이 되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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