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쉰'의 고개 넘기

by 권미경

”경기도 교육청에서 의뢰받아 디지털교육에 관한 설문조사를 진행중입니다. 잠깐 통화괜찮으실까요?“ 그냥 끊을까 했다가 교육청이라는 말에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실례지만 연령 때가 어떻게 되실까요?“

한순간 멍했다. 내가 이제 갓 50대가 되었지. 소리 내어 오십 대라고 말해 본다. 말에 주저하는 느낌이 묻어난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입안의 소리는 모나게 굴러 나오며 여기 저기 상처를 입힌다. 아직 어색하다. 열 아홉이 스물이 될 때의 어색함이 설레임이었다면 쉰의 문턱을 지난 기분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데 비키니를 입어야만 하는 당혹감과 비슷하다. 아직은 당당한 자세로 비키니를 입을 수 없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지나온 발자국들이 짙은 후회로 선명할지라도 불어오는 시간의 바람은 서서히 발자국들을 지워나간다. 밤 세워 방바닥을 기어도 잊지 못했던 괴로운 기억들도 결국 망각의 강을 건너 사라지거나 옅은 상흔을 남겨 놓을 뿐이다. 다시금 그 기억의 자리에 서더라도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새로운 것을 맞이할 때도 그렇지 않을까?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사이, 삼십 대에서 사십 대의 문턱을 넘어, 이제 오십에 들어선 나에게는 아직 발음하기 껄끄러운 ‘쉰’이라는 나이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이십 대는 첫 눈이 오는 날 마신 맥주 거품처럼 차가운 시절이었다. 후회할 걸 알면서도 따뜻한 코코아 대신 기어이 맥주를 시키는 나이. 많은 것이 처음이었기에 서툴렀고 유치했지만 봄날 피어오르기 시작한 연두빛 나무 같은 시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발산되는 기운만으로도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때였다. 산을 보기만 해도 계절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태연히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던 이십 대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그때. 시험에 실패했고, 취업은 불안했고, 사랑은 전면 휴업 상태였어도 서른이 되는 것만으로 내면에서 용기가 솟아 올랐다. 마치 진짜 어른이 된 것처럼.


그 용기의 옷을 입고 삼십 대에 결혼하여 세 명의 아이를 낳고 육아의 긴 터널을 통과했다. 아이들은 익숙해질 여유 같은 것 주지 않았다. 그냥 주어진 일을 마구잡이로 하다보면 얼렁뚱땅 서툰 엄마는 어느 결에 김밥 열 줄은 거뜬히 싸는 능숙함을 장착하게 된다. 마흔이 되었을 때 직업을 바꾸었다. 책 읽는 자들을 향한 질투의 시선을 거두고 책을 쌓아놓는 대신 읽기 시작했고 그 책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 지천명이라는 봉우리에서 글을 쓰는 자로 거듭나고 싶다. 나에게 ‘쉰’은 글과 함께 왔고 서툴지만 계속해서 글공의 실타래를 감고 있다. 그 공이 눈사람을 만들 만큼 커졌을 때에는 ”연령대가 어떻게 되시나요?“라는 질문에도 무감하게 ”50대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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