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타이밍이 이렇게 빨리 올줄 몰랐죠.
내 커리어는 내가 챙겨야 됩니다.
“이 타이밍이 이렇게 빨리 올줄 몰랐죠.”
회사 전화선을 깔고 카펫을 사고 인터넷을 설치하는 일도 함께 하며 회사 창립 후 2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했다는, 기술 영업을 해온 50대 초반의 아저씨 고객분이 찾아오셨다. 나를 찾는 분들은 보통 5~12년차 분들이 많은데, 나보다 더 삶의 경험이 많으신 분들이 오시면 왠지 모르게 긴장된다. 주제 넘은 헛소리를 하면 더 안될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여기까지 오시는게 이분에게는 특히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겠다 싶었다. 이 세대의 남자분들에게, 본인이 지나온 일 이야기를 다 터놓고 조언을 구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 아니므로.
딱 봐도 일만 해오신 분 같았다. 눈치가 없는게 가장 문제라고 하셨는데, 아닌건 참지 못하고 바른 소리 하시는 경우가 많았을 듯. 본인을 채용한 대표, 본부장과 동거동락하며 열일해오다 (한달에 7000km를 운전하고, 회사에서 밤새 토론하다보면 출근하는 친구들과 인사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최근 본인보다 어린 대표가 새로 왔다고. 그 다음부터는, 안봐도 비디오. 새로운 대표는 본인의 사람들로 회사를 채우기 시작했고, 회사의 히스토리를 다 알고 있는 이 분의 포지션은 애매해지기 시작, 바른 소리까지 해대니 점점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됐을 것.
그 대표도 참 어리석다. 막말로 자기가 잘되고 싶으면 이런 분을 본인의 지원군으로 만들면 될텐데. 회사는 대표의 사이즈만큼 커진다는 생각.
그분은 본인이 ‘방해가 된다'는 느낌을 받으셨다고. 일도 현격히 줄어들고 이곳에 더이상 있을 수 없는 상황인데 막막하다는 이야기들. 이력서는 한번도 써본적이 없고, 먼저 회사를 나가 자영업자가 된 선배들은 밖은 전쟁터고 너무너무 고생이니 어떤 더럽고 치사한 꼴을 보더라도 끝까지 버티라고 한다고. 회사 욕을 하거나 버티라는 이야기만 듣게 되서, 객관적인 조언을 들어야겠다 싶었다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마음이 짠해졌다.
그분이 해오신 기술영업 일도, 제조 공장의 일도 사실 내가 익숙한 분야는 아니라 다른 분들이 오셨을때처럼 그 섹터의 전망이나 회사 리스트를 읊어드린다거나, 커리어 경로에 대해 해드릴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아 걱정 했는데, 내가 뭔가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막막함과 허망함, 원망스러운 마음, 그동안 열심히 일한 자부심 등등 여러가지 마음이 교차하는 그 순간의 이야기들을 온 신경을 곤두세워 듣는게 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들.
나는 그분이 지나온 이야기를 한참 듣다, 솔직히 이력서 이렇게 쓰시면 안된다고 말씀드리며 요즘 젊은 친구들의 서류가 어떤지 보여드렸다. 끼깔나게 잘 썼다고 생각하셨다고.
아니오, 이렇게 쓰시면 아무도 안봐요. 뭔 일을 하셨는지 키워드 중심으로 명확히 보여야 헤드헌터가 자리를 추천하든 말든 할텐데 저도 뭘 잘하시는지 잘 모르겠는걸요. 내가 해본 경험들이 어떤 밸류가 있는지 그 포인트가 중요해요. 상대방에게 나를 어떻게 기억되게 할 것인가, 영업 해오신 일을 나에게 대입해 냉정하게 나를 시장에 나온 제품이라 생각하면 나의 무엇을 팔아야 상대방이 설득되서 사겠는지 생각해보셔요.
면접에서 어떤 질문을 받게 되실지,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다. 그 분 말마따라 말 재주가 없으셔서 연습 좀 같이 해보시자고 본인이 가진 것의 반도 못보여줄 것 같다고 말씀드리며.
주변에 내가 이제 FA 포지션이 될 것이라 이야기하시고, 내가 같이 일했던 곳들 중 똘똘한 곳들, 새로운 곳들 영업 뚫는다 생각하며 리스트업 해보시고, 링크드인과 리멤버에 프로필 업데이트 하시자고. 아저씨는, 여기서 잠깐 주저했다. 그렇게 했다가 회사에서 알면 뭐라고 할텐데..하며. 회사가 뭐라고 하던지 말던지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회사 생각 여태까지 많이 하셨으니 이제 그만하시고 내 생각만 하세요. 지금 나이에, 한 회사만 오래 다니신 경력에 이직 쉽지 않을꺼에요. 생각하신 것보다 엄청 터프할꺼에요. 나만 생각하세요.
여태까지 일 해오시느라, 앞으로도 이꼴 저꼴 보며 좀 버티셔야 할텐데 그 버팀과 부침을 겪느라 너무 애쓰신다는 이야기를 드렸다. 이제부터는 나를 좀 챙기시라고.
올해 말쯤, 아니 그 전에 잘되서 꼭 메일 주시겠다 하셔서, 꼭 잘되지 않아도 괜찮으니 언제든 메일 주세요 하며 이별.
조금이라도 그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 여러분,
휴일을 맞아 이력서를 한번 업데이트 해보시죠.
내 커리어는 내가 챙겨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