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야, 어떤 한 관계가 네 일상을 지배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 있니?
엄마를 잘 아는 네 아빠가 걱정을 했어. "여보, 또 너무 거기에 몰입해 있는 것 같아."
그때 난 네 유치원에서 일어난 문제로 거의 한달 간 학부모 모임에 온 에너지를 쓰고 있었어. 단톡방에선 매일 쉴새없이 이야기가 오고갔고 정점일 때는 하루에 열통도 넘게 서로 통화를 해야했어. 일하다 말고 모임에 나가야 할 때도 있었고, 연락을 주고 받지 않을 때에도 내 생각은 늘 거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 내 삶의 에너지 대부분을 이 모임에 쓴 거지. 그게 바로 사람 사이 관계 패착의 시작인듯 해.
별로 좋지 않은 문제 때문이었지만 밀착되어 하루 종일 소통하는 그 소속감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삶의 허전한 부분을 채워주는 듯한 느낌, 에너지를 쓰고 역동하는 상황의 한 가운데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만족을 얻었던 것 같아. 그렇지만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언제나 즐거울 수만은 없지. 서로 생각이 다르고 대화방식도 다르니깐 말이야. 의도치 않은 상처를 서로에게 주기도 하고, 섭섭한 감정이 들기도 한단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사람들에게 두는 무게, 들이는 시간, 쏟는 에너지가 곱해진 만큼의 감정을 느낀다는거야. 긍정적인 감정도, 부정적인 감정도 그 강도가 증폭되어 느껴지지. 모임에서 오고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기분이 좌지우지 되기도 하고. 그렇게 감정을 크게 크게 느끼다 보면 지치더라.
그리고 희안하게 긍정적인 감정은 아무리 강렬해도 그때 뿐 금세 날아가버리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아주 꾸덕꾸덕하게 내 마음에 들러붙어 누적돼. 그러면 나는 그 분들이 좋지만 매우 불편해지기 시작하는거지. 분명 좋은 분들이고, 나보다 나은 구석도 있는 분들인데도 누적된 부정적인 감정들이 커지면서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새가 없게 만들어. 그뿐만 아니라 그 관계에 내 삶의 에너지가 쏠리면서 나의 일상의 다른 중요한 많은 것들이 방치되어버린단다. 관계와 몰입, 좋은 두 단어들인데 만났을 때는 별로 좋지 못한 결과가 발생하는듯 하네.
몇 명과의 트러블로 시작해 엉망이 되어버렸던 첫 회사 생활도 비슷해. 회사에서 틀어진 한 두 명이 있었는데, 그 한 두명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이 마치 내가 회사에서 느끼는 전부의 감정인 것처럼 느껴졌거든. 그 한 두명과의 관계에 또 몰입하고 무게를 과도하게 실어줬던거지. 트러블을 겪는 와중에 분명히 내 곁에 남아서 조언해주고 안타까워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나를 괴롭게 하는 존재들만 노려보며 그들에게 내 감정을 좌지우지할 무게를 실어줬던 거야.
회사를 떠나기 전 나를 위해 모여 술 한잔씩 기울여줬던 동기들, 떠나는 날 엘레베이터 앞으로 뛰어와 힘들 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다며 눈시울을 붉히던 과장님, 서로 먹먹해서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괜히 손만 붙들고 장난스럽게 '안녀엉'을 외쳤던 사이들,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떠나기 직전 보낸 메일을 보자마자 해외에서까지 전화해 왜 떠나냐며 아쉬움을 전했던 선배, 사원 나부랭이의 퇴사 메일에 기꺼이 회신해서 같이 일해보지도 못해 본 게 아쉽다던 부장님, 과장님...
그런 사람들을 좀 더 바라보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감정들에도 무게를 좀 실어볼 걸
하는 후회가 생기는거야. 그렇게 지옥같던 회사에서는 몇 년 간 악마같은 이들의 얼굴만 보였는데 마지막이 되어서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회사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에 고개를 드니 그들의 얼굴이 보이더라. 그러니 아쉽더라. 그들의 얼굴을 , 또 회사 밖의 소중한 인연들을 볼 수 있었다면 회사에서의 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아니면 아직 끝이 나지 않았으려나...?
혹시나 어떤 한 인물이나 모임으로 인해 오랜간 마음이 들쑥날쑥 할 때 네가 꼭 엄마의 이 이야기를 떠올려줬으면 좋겠어. 영원한 관계는 없어. 관계를 항상 매우 좋게 유지해야 한다는 그 압박감에서 벗어나길 바래. 나쁘게 끝이난 관계가 너에게 영원히 영향을 미칠 거라는, 이 관계에서 떨어져 나오면 나는 영원히 혼자가 되어 외로울 것이라는 비합리적인 신념도 버리길 바래.
관계를 항상 좋게 유지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건 애초에 네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그리고 인생의 수많은 관계 중에 몇 개가 나쁘게 끝이 난다 해도 네 인생을 망치진 않아. 그러니 너무 많은 너의 시간과 에너지를 하나의 관계에 쏟지 않길 바랄 뿐이야. 그 관계 안에서의 미처 해결되지 못한 감정이 있어 찜찜하다 해도, 그 관계에서 조금 물러났을 때의 소외감이 걱정되어도, 고개를 돌려 일부러 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보고 어울리렴. 더 나아가서는 관계에 속해있지 않은 [혼자의 것들]에 주의를 돌려봐. 혼자 마시는 커피, 혼자 그리는 그림, 혼자 쓰는 글, 혼자 걷는 길 같은 것들 말이야. 네 인생엔 단순히 몇 사람 때문에 못 보기엔 가치있고 즐거운 일들이,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단다.
나의 훌륭한 상담사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 하더구나. "'주의'는 손전등 같아서 손전등이 비추는 그 작은 원만 바라보게 한다"고. "어떤 것에 지나치게 주의가 집중됐을 때 의도적으로 주의를 돌리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이야. 그 이야기를 듣고선 엄마는 학부모 단톡방 알림이 아예 뜨지 않도록 해놓고 일부러 더 다른 일들을 찾았단다. 네가 잠들고나서 부엌 한 켠에 쭈그려 앉아 쏟아지는 단톡방 메시지에 일일히 답하는 대신에 핸드폰을 침실에 두고나와 집안일을 하고, 네 아빠와 산책을 나가고, 공부를 해보기도 하고... 나의 일을 일부러 더 하기 시작했어. 그렇게 며칠 지나니 변화가 생겼어. 관계 속에서 느끼던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희석된거지. 그러니 부정적인 감정에 가려져있던 관계가 주는 소소한 만족감이나 즐거움이 좀 더 와닿기도 하더라. 관계 자체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건강한 관계로 변화한거지. 변화를 바라보며, 너에게 "해보니 되더라. 어렵지 않더라."라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게 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단다.
나의 소중한 딸 J가 관계에 파묻혀서 삶을 바라보기 보다는 삶의 컨트롤타워에서 여러 관계들을 덤덤하게 조망하고 중심을 잡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표지사진 출처: https://englishlive.ef.com/blog/language-lab/start-conversation-english-guide-small-t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