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아를 키우며 부족한 잠에 한창 예민해져있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 수유를 마치고 잠이 깨버려 한참을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락말락 했던 그 순간이었다. '꺙!'하는 처음 들어보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나더니 태풍이가 다급하게 안방 문 손잡이를 열고 침대 위로 펄쩍 뛰어올라왔다.
순간 잠든 지 얼마 안 된 아이도 찡 하며 뒤척거렸고, 나는 태풍이에게 있는대로 짜증을 내며 안방 밖으로 내쫓았다. 문을 걸어잠그고도 한동안 달그락달그락 하는 태풍이의 문 여는 시도에 히스테릭 해져 베개로 두 귀를 막고 애써 잠을 청했다. 그 다음날 아침, 우리는 화장실 모래 위에 똑똑 떨어져있는 피를 발견했다. 태풍이는 밤에 소변을 보다 이기지 못할 고통에 놀라 엄마에게 달려왔던 것이다. 나는 그런줄도 모르고 그랬던 것이다.
그게 끝의 시작이었다.
불치병인 신장 림포마였다. 태풍이는 6개월 넘게 투병생활을 해야했다. 겨우 2년 반의 짧은 삶 중에 6개월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고 매일같이 병원을 들락날락 거리다가 갔다.
탈수를 막기 위해서 수액치료를 해야 했는데, 매일 병원에 가는 것이 힘들어 남편이 피하 수액 주사하는 법을 배웠고 저녁마다 우리는 태풍이의 등을 찔러야 했다. 작용 기전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작용한다는 스테로이드 밖에 먹일 약이 없었다. 주 2회는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하고 철분제를 맞춰야 했다. 신장림포마의 주증상 중 하나는 빈혈이기 때문이다. 아기띠로 아기를 안고 한 손에는 태풍이가 탄 캐리어를 들고그렇게 동물병원을 드나들었다. 보험도 되지 않고, 의료수가 자체도 비싼터라 한 번 갈 때마다 병원비는 몇 십만원씩 깨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태풍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성수동의 펫샵에서 데려온 스노우 뱅갈 고양이 태풍이는 정말 작고 귀여운 영물이었다. 펫샵의 투명 케이지 안에서 한 쉬도 쉬지 않고 우리를 보며 케이지를 두드려 대고 있었고 그게 묘연인 것 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식구가 된 뒤 태풍이와 누렸던 행복한 기억들은 그저 수백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일부러 들여다 보지 않으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픈 줄도 모르고 매정하게 외면했던 그날의 비명 소리, 짜증으로 가득 찼던 나의 마음, 침대 위에 올라왔던 태풍이의 겁먹은 표정, 사정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내쫓고 문을 잠궜던 그 순간은 만 4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수시로 떠오른다.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마음에 남아버렸다.
병세가 깊어지며 하루 종일 화장실 앞 발매트에, 옷 방 구석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태풍이를 보면서 "너무 아프면 버티지 말고 제발 그냥 가. 가도 돼 태풍아."라며 원망섞인 부탁을 했던 순간들,
태풍이를 보면 심란해져서 아이에게 영향이 갈까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던 시간들,
임의로 2배로 늘려 먹인 스테로이드에도 곡기를 끊고 바닥에 늘어져있는 태풍이를 보내주기로 했던 그 날만 마음에 진하게 남아버렸다.
고양이의 신장림포마는 난치도 아니고 불치병이었다. 모든 치료는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죽음을 미루거나 사는 동안의 삶의 질을 조금이라도 올려주는 임시방편 뿐이었다. 신장림포마로 죽은 아이들은 대부분 엄청난 고통으로 몇 시간을 몸부림치다가 죽는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안락사를 염두해 두고 있었고 그 시기는 아이가 곡기를 끊는 시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강력한 진통 패치로 통증을 줄여가며 집에서 보내줬다는 케이스를 언급하며 의사에게 가능할 지 물었지만, 패치가 오히려 아이를 더 힘들게 할 수 있다며 권하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음에도급작스러운 결정이었다. 의사는 우리에게 검사결과지를 보여주었다. 수치를 보면 지금 집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쇼크가 와서 무지개다리를 건너도 이상하지 않다는 설명과 함께. 잠시간의 침묵 후 저녁에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우리에겐 약 3시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비쩍 곯은 태풍이를 품에 안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태풍이가 아가때부터 내가 혼자 가사까지 붙여 아침이면 불러주던 노래였다.
"사랑하는 우리 태풍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고양이~"
마지막으로 츄르라도 실컷 먹고 가라고 4개를 한꺼번에 짜주었는데 며칠간 먹지않던 츄르를 단숨에 해치우는 녀석을 보면서 그 순간까지도 희망을 잠깐 품었고, 아직 살려는 의지가 있는데 우리가 억지로 보내는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병원으로 떠나기 전 태풍이를 안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니며 마지막 인사를 하게 했다. 녀석이 외로울까 들인 둘째 고양이 토리에게도 알아듣는 지 모르겠지만 이별을 설명해 주었다.
처치실에서 라인을 잡고 나온 태풍이는 진찰대 위에 앉아있었다. 몇 달동안 흐리멍텅하던 눈빛은 간 데 없이 갑자기 말똥한 눈빛으로 마징가 귀를 한 채, 하염없이 울고있는 우리를 향해 "왜 그래? 무슨 일이야?"라고 묻는듯 했던 태풍이의 마지막 표정은 마치 커다란 액자가 되어 내 생각 속 긴 복도의 벽 어느께에 걸려있는 듯 하다.
생각의 길을 걷다보면 외면하려 해도 복도의 그 액자가 나를 간절히 바라보는 듯한 느낌에 결국 달려서 돌아가 액자 안을 들여다 보고 그 날의 슬픔과 절망과 회한으로 빠져들고 만다.
안락사의 결정은 옳았던 걸까?
너는 끝까지 살고 싶었던 것 아닐까?
내가 무슨 자격으로...네 마지막을 결정했을까?
너는 괜찮은데 내가 힘들고 무서워서 너를 보낸걸지도.
태풍이는 죽음을 5분도 남기지 않았던 그 순간까지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왜 당신들은 슬퍼하는 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액자를 내 마음속에 남긴 채 갔다.
다음날 화장장이 예약되어 있어, 사체를 집에 밤새 둬야 했다. 둘째 고양이 토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어 보여주었더니 냄새를 킁킁하고선 사뿐사뿐 그 위를 밟고 다녔다. 둘이 사이가 꽤나 좋았었는데 슬퍼하는 기색은 없었다. 토리는 죽음이 뭔지도 모르고 영혼이 빠져나간 그 사체는 태풍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날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 반려동물 화장터로 가서 가장 좋은 관에 좋아하던 장난감 몇 가지와 편지를 넣어 화장시켰다. 화장장 안으로 들어가는 태풍이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태풍아, 미안해. 거기서는 엄마 아빠 기다리지마."
우리가 짧은 여행을 갔을 때도, 아이를 낳고 조리원에서 남편이 10시나 되어 집에 돌아갈 때도 cctv 속 태풍이는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 퇴근시간이 되면 늘 현관 앞에 한참을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 고양이 별로 돌아가서도 퇴근시간마다 그렇게 기다릴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그렇게 가는 아이의 등 뒤에 대고 울면서 부탁했다.
"이제 절대로 엄마랑 아빠 기다리지마 태풍아. 그리고 아프지마. 편히 쉬어."
그러고는 1년 뒤,
아직은 어렸던 우리 부부가 감당하기 힘든 또다른 죽음을 맞이하게 됐을 때 태풍이가 남편의 꿈에 나왔다고 한다.
마치 "뚠동이는 내가 천국까지 잘 데려갈테니 너무 걱정하지마요." 하는 느낌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