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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투리안 Oct 04. 2019

<여수밤바다> 그래, 그냥 좀 살자

전주국제영화제. 2017. 정형석.


그냥 만든 영화라고 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그립다.


하나. <여수밤바다>는 그냥 만든 영화라고 했다. 전주국제영화제 GV 시간에 한 관객이 영화의 기획의도를 물었고,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그냥’ 만든 영화다. 다소 멋쩍게 내뱉은 감독의 말에서 나는 통쾌함을 느꼈다.     


둘. 그리고 감독은 성실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굳이 메시지를 찾자면 ‘그냥’일 것이다.” 연극 무대에 선 배우가 아무 이유 없이 동선을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삶도 아무 이유 없이 움직여볼 필요가 있다, 고 덧붙였다.     


나는 감독이 말한 ’그냥’ 이란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그의 첫 영화라지만 감독이 내뱉은 ‘그냥’이란 단어는 결코 무책임하지 않았다. 한국영화의 악습을 비껴간 영리한 시나리오고 영리한 연출이다. 내공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다.      


우리는 각자의 직관이 작용하는 순간,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왠지 그래야할 것 같은 순간에 ‘그냥’이란 단어를 내뱉는다. 그래서 ‘그냥’이란 단어엔 개성이 담겨있다. 감독이 그냥 만든 영화라고 했을 때 그 말엔, 감독 본인의 직관에 의해 만든 영화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매력적인 롱테이크 씬. 오른쪽이 감독 겸 남주


영화는 산업이다. 소위 안전빵을 선호한다. 그래서 영화적 관습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극작하고 연출한다. 관습은 나쁜 게 아니지만 관습에 종속된 태도는 나쁘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거다. 한국 영화는 관습에 함몰된 지 오래다. 비슷비슷하다. 난 그게 지긋지긋하다.


<여수밤바다>는 그렇지 않다.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 2명과 여자 1명의 이야기로 흔한 삼각 구도를 벗어나 새로운 판을 짠다. 이야기의 큰 흐름뿐만 아니라 인물과 인물이 마찰하는 순간 순간이 관습에 얽매이지 않아 호쾌하다. 메시지에 목매지도 않는다.


혹자는 홍상수 영화와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형식의 유사성을 발견할 순 있어도 둘은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다. 홍상수는 홍상수 직관에 따르고 여수밤바다 감독은 그의 직관을 따를 뿐이다. 직관은 성향에 따라 다르고 그래서 영화는 각자의 성향대로 귀결된다. 홍상수 영화는 홍상수를 닮았을 거고, <여수밤바다>는 여수밤바다 감독을 닮았을 거다.



그냥 움직여보는 삶 



감독은 우리 삶도 아무 이유 없이 움직여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 연극연출가인 지석은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선 이렇게 말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 그게 이유야.”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지석의 직관에 따른 결과였고 그렇게 자신의 개성을 지켰다.


사회생활엔 ‘그냥’이 허락되지 않는다. 개선안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건 왜 이런 거야? 라고 묻는 팀장님에게 그냥요, 라고 대답하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사회는 개성이 아니라 사회성을 원한다. 공통의 가치를 공통의 언어를 사용해서 추구해야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개성을 잊고 산다.


우리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인이다. 개성과 사회성이 충돌하여 어려움을 겪곤 한다. 개성을 지키기 위해 사회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도 있고, 개성을 죽이고 사회에서 아등바등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후자다. 나도 그렇다.     


애정하는 영화 속 감초들


감독은 개성이 이끄는 삶의 필요성을 말했다. 그가 예술가가 아니었다면, 그가 의사나 CEO나 판사 같은 사회적 선망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사회성의 중요성을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술은 자기 개성을 확고히 하는 작업이고, 그래서 개성의 중요성을 말하는 그는 예술가다.     


감독은 본인의 개성을 지키면서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 꽤나 성공한 것 같다. <여수밤바다>의 턱없는 낙관과 긍정이 설득력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그는 본인의 역할을 다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혹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개성을 지키면서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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