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의 나라, 기생충 그리고 설국열차
이 글에는 영화 <성혜의 나라> <기생충> <설국열차>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성혜의 나라>에 대해 리뷰할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아카데미 4관왕 이슈로 <기생충>을 곱씹다 보니 <성혜의 나라>의 결말이 다른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싶었다. 결국 설국열차를 멈추게 할 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달까.
이 글은 기생충의 기우(최우식)와 성혜의 나라의 성혜(송지인)를 비교하는데서 시작됐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계급 우화’라고 표현한 것처럼 <기생충>은 고착화된 계급사회를 보여준다. 이번에 언급하려는 건 오직 기우 캐릭터다. 4수생, 사회초년생인 기우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사는 청년이 될까. 마지막 장면, 기생하는 것에 실패한 기우의 각성이 담긴 내레이션을 떠올려보자. 대강 이런 내용이다.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대저택을 사겠다. 아버지는 계단을 올라오시기만 하면 된다.
계급사회에서 기우가 선택한 길은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이다.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가족을 되찾기 위해.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한 일이다. 기우는 높은 확률로 소망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야 한다는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평생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와 이로 인한 계급의 발생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격차의 심화다. 자본이 계급이 된 사회에서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부당하리만큼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 지점에서 N포 세대라느니 YOLO족이라느니 하는 흐름이 발생한다.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길 포기한다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이런 흐름을 안타깝게 혹은 한심하게 생각한다. 청년이라면 제 한 몸 으스러지게 바쳐서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야 한다는 명제에 한치의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 아니던가. 아픈 만큼 성장하는 법이지. 라면서.
그런데 왜?
왜 그래야 하는데?
<성혜의 나라>의 성혜는 <기생충>의 기우와 처지가 비슷하다. 다른 게 있다면 너무나 착실하여, 우둔할 정도로 성실하여, 제 몸이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산다. 그럼에도 삶은 나아질 것 같지 않다. 기우처럼 사회성 혹은 기생하는 요령이 뛰어나든, 성혜처럼 한없이 성실하든 하층민의 처지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어디서 큰돈이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어맛, 그런데 성혜 앞에 5억이 뚝 떨어진다.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갈 기회가 생긴 것이다. 5억을 종잣돈으로 부동산 투자나 사업을 해볼 수도 있고, 당장 오피스텔을 하나 사서 월세를 받으며 살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성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포스터에도 적혀있듯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이 선택엔 계급을 무력화하는 힘이 있다.
생존권을 보장받은 청년이, 계급의 사다리를 오를 것을 거부하고 본인만의 삶을 꾸려가는 것. 이것이 바로 성혜의 선택이다.
이 지점을 기성세대들은 두려워해야 한다. 성혜와 같은 선택을 하는 청년들이 많아질수록 기성세대들은 더 이상 본인 밑으로 줄 세우기를 할 수 없다. 본인들이 가진 권력이 아무 소용 없어질 수 있단 뜻이다. 설국열차를 멈추게 한 폭탄과도 같은 것이다.
기분이 묘하다. 새로운 세상의 태동을 느낀다. 계급화된 사회구조와 무관하게 본인만의 삶을 꾸려가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정부가 청년의 생존권을 보장해주는 때가 온다면, 이러한 기세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 애쓰며 살아왔다. 나도 너무 애쓰며 살아왔다. 이제 평안해지고 싶다.
추가) 성혜의 나라 gv 때도 나온 얘기지만 정책을 만드는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생산적인 논의를 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