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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Aug 11. 2024

더 플랫폼

더 플랫폼


'설국열차'의 세로 버전이면서 '오징어 게임'의 속성을 결합한 영화. 알레고리로 가득한 영화는 해석의 여지가 많아서 좋다. 영화 속 배경은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이고, 이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밑바닥이 몇 층까지 있는지 알 수 없는 깊이의 공간이다. 공간과 시간이 모호한 배경은 SF나 판타지와 연결된다. 이걸 뒷받침하는 장치로, 음식이 올려진 직사각형의 거대한 돌이 아무런 견인 장치 없이 공간을 이동한다. 0층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데, 이 돌이 어떤 원리로 움직일까 생각하면, '자기부상' 원리처럼, 돌이 움직이는 건물 중앙의 직사각 공간에 자기장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돌에도 자기장이 있어 서로 극성을 띈 상태로 공간에 떠 있는 상태로 만들 수 있을 걸로 상상할 수 있다. 음식을 담은 돌이 각 층에 정확히 멈춘 다음, 일정 시간 - 약 1분 - 멈췄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도록 프로그래밍할 수 있고, 가장 아래층까지 내려가서 다시 빠르게 0층으로 올라오는 비교적 단순한 루틴을 만들 수 있다.

이 '플랫폼'을 만든 사람(들)은 '오징어게임'에서 게임을 만든 사람(들)과 비슷한 의도를 갖고 있는 걸로 보인다. 생존 게임에서 살아남으면 커다란 보상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을 건드린다. 한편 0층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음식이 부족해 생존이 어렵다는 점에서 '설국열차'의 빈부 격차를 세로로 보여준다.

플랫폼을 만든 누군가는 실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모아 그들이 원하는 대가를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일정 기간 플랫폼에서 살도록 한다. 이때 실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온전히 자기의 의지에 따라 플랫폼에 들어온다. '오징어게임'에서는 게임에 참여하도록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유혹(막대한 돈)이 사람을 끌어들인다면, '플랫폼'에서는 개인을 면담하고, 그들의 음식 취향까지 반영하며, 플랫폼에 들어올 때 자신이 원하는 물건 한 가지를 들여올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한다.


플랫폼은 자본주의 현상을 극단적으로 실험하는 장치다. 높은 층에 있는 사람은 잘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음식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라지고, 식탁은 더러워진다. 아래쪽 사람은 음식 구경을 하기 어렵고, 살아남으려 동료를 살해해 인육을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최상층의 최고급 요리부터 생존하려고 동료를 잡아 먹는 원시의 상태까지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인물의 행동을 통해 날것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고렝은 플랫폼에 들어올 때 소설 '돈키호테'를 가져온다. 다른 사람들은 각종 무기나 도구, 생활용품 등을 가져오는데, 책을 가져온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는 말을 듣는다.

여기서 사람들이 가져온 '도구'나 '용품'은 개인의 욕망을 상징하는 도구이면서, 자본주의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이기도하다. 이들이 소유한 도구는 플랫폼에서 생존하기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서 가져왔고, 실제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칼을 가져온 고렝의 동료 노인은 낮은 층에 있을 때, 동료를 살해해 인육을 먹으며 생존했다.

'식인' 풍습은 인류 진화 과정에서 초기에 실제했던 풍습으로, 문명 사회가 된 최근에도 일부 부족에서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식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단순히 식량이 부족해 생존의 목적으로 식인을 하는 사례가 있고, 전통적인 풍습의 식인은 고인의 살을 먹음으로써 고인의 지혜를 물려받는다는 의미도 있다.

식인 풍습이 사라진 건 인류가 농업을 시작하고, 식량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서부터다. 제사 의식이나 종교적 관례로 식인의 흉내를 내는 형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식인'을 굶주림을 해소하는 이유는 사라지고, 점차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때 '식인'이 혐오로 바뀌는 건, '근친교배'처럼 오랜 경험을 통해 유전적 발현이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플랫폼에서는 원시 단계의 풍습인 '식인'부터 점차 위로 올라갈수록 개인의 삶은 '문명화' 한다. 문명화의 상징은 '음식'이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채집, 수렵에서 농업을 발견했고, 식량의 증산을 통해 과학, 기술, 문명을 발달했다. '음식'은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상징하는 대표 아이콘이며, 인류 문명에서 계급을 상징하고, 차별하고, 드러내는 대표 이미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음식은 누구나 사 먹을 수 있지만, 실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뚜렷이 구분된다. 즉, 최고급 호텔이나 레스토랑의 음식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사 먹을 수 있지만, 95%의 대중은 평생 그런 음식을 먹지 못하고 죽는다. 한 끼에 수십 만원, 수백 만원 하는 음식을 선뜻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일부 부르주아들이다.

'플랫폼'에서 0층의 음식은 바로 이런 부르주아가 먹는 최고급 요리다. 최고의 재료로, 가장 맛있게 조리된 음식이 놓이면, 부르주아가 먼저 먹는다. 부르주아가 먹고 남긴 찌꺼기가 아래로 내려오고, 중산층, 서민, 극빈의 프롤레타리아는 찌꺼기를 먹으며 생존해야 한다.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죽는다. 현대 사회에서 계층별 사망자 비율을 보면, 3D 노동을 하는 노동자의 사망률이 가장 높다. 즉,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노동자는 죽음에 더 가까이 있고, 이들은 같은 나이대의 부르주아보다 더 일찍 죽는다.

다만 '플랫폼'은 한 달마다 리셋하는 기능이 있어 계층을 뒤바꾼다. 가장 아래층에 있던 사람이 가장 높은 층에 올 수 있다. 무작위로 주어지는 공평한 제도를 통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 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려는 실험이다. 

높은층에 있던 사람이 낮은층으로 가면 실망, 절망한다. 그 반대는 안도의 한숨과 희망을 보인다. 사람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확인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한다. 인간의 행동은 오로지 개인의 의지처럼 보이지만, 이미 진화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 행동심리학, 집단심리학 등을 통해 개인의 행동은 그 집단 속에서 자연스럽게 규정되고 있다.

높은층에서 욕망을 충족한 개인은 과거 낮은층에 있을 때 겪은 괴로움과 고통을 잊으려 한다. 그 경험을 교훈삼아 낮은층에 있는 사람에게 음식이 도달할 수 있도록 음식을 적당히 먹고, 분배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그런 사람이 등장하지만, 인간의 이기심을 이기지 못한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고,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의 동물적 속성,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생존하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폭력도 불사하는 생존 본능과 욕망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고상한 의지보다 앞선다.


영화 속 장치를 읽는 것도 재미있다. 플랫폼에 들어온 사람들은 수직으로 열린 공간에서 생활하는데, 이건 제르미 벤담이 설계하고, 미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말한 '파놉티콘'의 수직 버전이다. 플랫폼을 설계한 사람은 가장 위층에서 가장 아래까지 각 층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편리한 감시 시스템을 만들었다. 플랫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0층에 있는 사람은 플랫폼을 관리하는 사람이고, 그의 의지에 따라 플랫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플랫폼이 333층인 이유는 서양에서 숫자 3이 갖는 의미와 연결된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에서 숫자 3은 가장 완벽한 의미를 갖는다. '성부, 성자, 성신'은 신성을 의미하며, 동양에서도 '하늘, 땅,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완전수다. 

하지만 플랫폼에서는 333층에 각 층마다 두 명이 있어 사람의 합계는 666명이다. 666은 서양 기독교 문화에서 악마의 숫자로 알려졌다. 즉, 플랫폼은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한 형태의 사회로 만들었으나, 그곳에 사는 사람은 666명으로 악마의 숫자를 이루고 있어, 인간 세계가 지옥이라는 걸 상징한다.

물리적으로 333층은 약 1,200미터 높이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층 빌딩인 브루즈 할리파보다도 400미터 이상 높다. 이 높이는 인류가 아직 구현하지 못한 높이이며 최첨단 과학기술이 적용되어야 만들 수 있는 건물이다. 플랫폼이 수직 감옥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최첨단 기술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렝은 동료와 함께 음식이 있는 승강기 돌을 타고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다. 이들은 높은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분배하지 않고(다음 날 먹을 수 있으니) 50층 이하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준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층에서 어린아이를 발견한다. 플랫폼의 원칙에 따르면 플랫폼에는 어린이는 절대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고렝은 어린아이를 0층으로 올려 보내면 플랫폼을 운영하는 누군가가 아래층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시스템을 바꿀 거라고 희망한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밑바닥에 도착하고, 어린아이를 0층으로 올려보낸다. 이때 어린아이의 존재는 '설국열차'에서 열차 바깥으로 나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요나와 티미의 존재와 같은 상징이다. 어린아이는 미래이며 희망이다. 플랫폼이 어른들이 만든 지옥이라면, 그곳에서 탈출하는 어린아이는 어른의 미래이며, 어른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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