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노드롬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명제를 보여준 영화. 추천할 정도는 아니지만,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려는 의도는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랠피는 우버 서비스를 하고 있고, 지금 그의 수입은 우버로 버는 돈이 유일하다. 영화 시작부터 날카로운 불협화음의 음악이 관객에게 불안과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 이건 랠피의 감정 상태를 드러내고 있어, 그가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감정을 청각화 한 것이다.
그의 여자 친구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고, 곧 출산을 앞둔 임산부여서 몸과 마음이 힘들다. 랠피는 여자 친구 '샐'의 출퇴근을 돕고,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 '샐'은 산부인과 검진을 더 받아야 하고, 아이에게 필요한 옷이며 각종 용품도 구입해야 한다.
그는 지금 우버 서비스를 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정원사로도 일했고, 다니던 직장이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해고당했고, 불안정한 삶으로 마음은 늘 불안하고 스트레스가 심하다. '샐'도 돈을 벌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랠피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데, 랠피는 한편으로 아이를 바라면서, 한편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어깨를 짓누른다.
랠피는 우버 서비스를 하는 동안 손님이 차에 핸드폰을 놓고 내리면 돌려주지 않고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받는 방식으로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돈을 벌려 한다. 이런 행동은 나중에 결국 사람을 살해하고 죽은 사람의 물건을 가져다 전당포에 팔아 먹는 행동으로 이어지는데, 랠피의 범죄가 그의 내면의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랠피를 용납하기는 어렵다.
랠피는 친구 제이슨을 통해 어떤 '모임'을 알게 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참석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모임'은 남성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멘토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멘티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금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유사 가족을 형성한다. 지도자이면서 '아버지'인 댄이 랠피를 이끄는데, 댄은 랠피의 내면에 있는 모든 걸 표출하라고 말한다.
이때 댄이 하는 행동은 대단하지는 않아도 일종의 종교 형식을 드러내며, 이들이 특정한 종교를 신봉하지는 않지만, '영적 행위'를 공동체를 운영하는데 중요한 도구로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닥친 어려움과 내면의 슬픔, 고통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데,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치유되는 효과가 있다. 정신과 치료 과정에도 집단 상담과 집단 치유가 있는 것과 비슷한데, 사람들 앞에서 내 슬픔과 고통을 공개하면, 내면의 압력이 낮아지는 효과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랠피 역시 댄의 주도로 이루어진 공개 치유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에 숨기고 있던,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충격과 고통의 트라우마를 말한다. 랠피가 어릴 때, 어느 크리스마스에 아버지가 집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랠피는 자기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기억으로 괴로웠고,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원망했으며, 이 슬픔과 분노의 감정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가라앉아 트라우마로 작동했다.
'모임'에서는 남성들만의 세계를 이루어야 하며, 아내나 여자 친구를 떠나 공동체에 합류하기를 종용한다. 랠피 역시 여자 친구를 떠나 공동체에 합류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이 남성 공동체가 지향하는 이념은 '여성 중심 사회에서 해방'이다. 현대 세계는 남성 우월 사회, 남성 가부장제 사회라는 건 상식이다. 남성들이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여성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여기고, 여성이 남성을 공격한다고 믿으며, 여성을 적으로 생각하는 소수의 남성들이 실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남성들의 생각과 시각이 옳다고 보기 어렵다. 개별적 경험으로 여성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개인의 경험을 전부라고 믿는 건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이 공동체에 모인 남성들은 모두 개별적 경험을 일반화 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남성이 다시 권력을 획득해야 하며, 여성이 가진 권력을 뺐아야 한다고 믿는다. 남성들이 유사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는 장면에서 단순히 남녀의 사회적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장치만이 아니라, 이 공동체가 동성애를 중심으로 하는 커뮤니티는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랠피는 공동체에 머무르려 하면서도 계속 자신과 집단을 의심한다. 랠피는 남성 공동체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공동체가 지향하는 '여성 중심 사회에서 해방'이 곧 여자 친구와 결별해야 하는 뜻이라는 걸 알고는 몹시 갈등하는데, 여자 친구와 공동체 사이에서 갈등하는 랠피의 내면은 점차 폭력적으로 변한다.
영화에서 동성애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관객이 보기에 조금 뜬금없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감독은 왜 일부러 동성애 장면을 넣었을까. 감독 존 트렌고브는 다른 영화에서도 동성애 코드를 넣었는데, 감독이 동성애자인지 알 수 없지만, 동성애에 호감을 보이는 건 사실이다.
랠피는 우버 서비스를 할 때, 손님으로 동성애 커플을 태웠는데, 그들이 차안에서 애정 행각을 보이자 갑자기 분노하며 폭주한다. 그리고 그가 다니던 체육관에서 랠피의 주의를 끌던 한 흑인 남성의 뒤를 추적해 갑작스럽게 만나는데, 이때 두 사람은 뜬금 없이 섹스를 하고, 랠피는 상대 남성을 총으로 살해한다.
랠피는 여자 친구와 살고, 곧 자기 아이를 볼 상황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성정체성을 혼란스러워 하는 인물이다.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양성애자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는 랠피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 때문으로 보인다. 즉, 아버지에 대한 미칠 듯한 증오와 그리움이 양가 감정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그 감정은 애정과 증오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의 성정체성 역시 남성(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함께 증오가 겹쳐 있는 걸로 보인다. 랠피가 동성애 상대 남성을 살해한 행동 역시 랠피 자신이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그런 이유다.
랠피는 밖에서 종잡을 수 없는 행동 - 여자 친구 퇴근 시간에 맞춰 픽업해야 하는 걸 일부러 하지 않고,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흑인 남성을 뒤쫓아 동성 섹스를 하고 그 남성을 살해한 다음 죽인 남성의 시계, 목걸이, 외투 등 금품을 전당포에 팔아 돈을 받는 행위 등 - 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여자 친구는 아이만 남기고 사라진다.
여자 친구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아이가 태어났고, 한동안 육아를 하느라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자신과 아이를 보호해야 할 남자 친구(랠피)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수입도 일정하지 않으며, 마치 자기와 아이를 버릴 듯한 태도를 보인다면, 여성의 입장에서는 남자를 믿을 수 없고, 배신감을 느낄 건 당연하다.
랠피는 덩그러니 남은 갓난 아이를 끌어 안고 다시 공동체를 찾아간다. '아이를 버리고 떠난' 경험을 한 랠피로서는 그 아이가 어릴 때 자신과 같다는 동일한 처지를 갖는다. 아이를 떠나는 건,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와 같은 행동이라는 걸 알기에, 랠피는 어떻게든 아이를 보호하려 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도망 나온 공동체를 다시 찾아가는 것이다.
'아버지' 댄은 돌아온 랠피를 다시 맞아주려 하는데, 랠피는 불안하다. 여기에 경찰들이 들이닥치고, 랠피가 살해한 흑인 남성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공동체의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랠피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지만, 댄을 살해하고 도망한다.
이 다음의 이야기는 약간 맥이 빠지고, 랠피가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과정이 싱겁게 보이는데, 랠피가 더 이상 도망할 수 없는 존재론적 한계에 맞닥뜨리는 것과, 그가 실제 죽지 않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 과정은 필연적 결과다. 랠피는 어릴 때 겪은 심각한 사건으로 트라우마가 생겼고, 그 무의식의 압력이 그의 삶을 지배 아니 파괴했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이 모두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지만, 랠피의 경우, '가난'이 가장 큰 방아쇠로 작동한 건 분명하다. 그가 경제적 압박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그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그는 결국 스스로를 파괴한다. 물론 가난과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이 자기를 파괴하는 건 아니지만, 인간은 의외로 무의식의 압력에 쉽게 굴복한다. 그걸 겪으면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