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건우 Sep 25. 2024

베스트 오퍼

베스트 오퍼


욕망에 눈 먼 남자의 파멸. 두세 번 정도 본 영화. 왜 보게 될까 생각하니, 영화에 나오는 예술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고,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서야 연출한 감독이 누굴까 찾아보니 '시네마천국',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만든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었다. 아하, 이 영화가 끌리는 이유가 있었다.

줄거리만 요약하면 영화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들이 대부분 마지막 장면의 반전을 위해 앞부분부터 차근차근 빌드업 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앞부분의 약간 지루함을 참고 봐야 하는데, 이 영화는 눈이 호강하기 때문에 지루한 줄 모르고 보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개성 있고, 독특한 매력을 갖는데, 감독은 인물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그저 평범하고 도드라지지 않는 인물도 적당한 거리에서 숨겨둔다. 이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 사실은 모든 서사의 주인공이자, 설계자라는 사실을 관객이 쉽게 알 수 없도록 함으로써, 감독은 끝까지 관객이 주인공의 입장, 주인공의 시각, 주인공의 사고방식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한다. 

이때 관객은 영화의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고,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사실을 처음부터 다시 뒤집어 해석해야 하는 -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알아챘겠으나 - 시간을 갖는다. 감독은 우선 간단한 장치로 관객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주인공 올드먼의 등장과 그의 습관, 그가 보이는 사소한 몸짓과 언행을 통해 올드먼이라는 사람의 존재감을 키운다. 그는 백 켤레가 넘는 가죽 장갑을 가지고 있으며, 상황에 맞게 자주 바꿔 낀다. 가죽 장갑을 끼는 이유는, 그가 만지는 세상의 모든 물건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맨손으로 사물을 만지지 않는 행위는 심리적으로 자신과 세상을 분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무의식적, 상징적 행위다. 즉, 올드먼은 세상 속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고, 부과 명예를 누리며 살지만, 그는 세상과 단절되기를 바란다. 세상 누구도 믿지 않으며, 마음을 열고 가깝게 지내고 싶은 사람도 없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와 경매장 그리고 단골 레스토랑만 다니는 경직된 생활을 하고, 그가 소유한 물건이나 먹는 음식은 최고급으로만 선택한다. 그는 예술품을 감정하고, 경매를 통해 비싼 값에 판매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그의 판단은 미술, 고예술품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이 정도 성공한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는데, 문제는 올드먼이 60대의 총각이라는 점이다. 그는 결혼한 적 없고, 연애조차 하지 못한 '오리지널 총각'이다.

올드먼의 유일한 취미이자 행복은 경매를 통해 빼돌린 여성 초상화를 수집한 방에 앉아 벽에 걸린 수백 명의 여성 인물화를 바라보는 것이다. 올드먼은 여성을 대상화 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여성에게서 소외당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즉, 그는 단 한 번도 여성과 가까운 사이였던 적이 없었고,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하며 살아 왔다. 그가 아는 여성은 그림으로 박제되어 있고, 얼굴은 있되, 표정도, 언어도 없는 무생물의 존재로 개념화 된 상태다.

올드먼의 사회적 성공과 다르게 올드먼 개인의 삶은 지극히 불행했던 과거를 통해 그가 현재의 삶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알 수 있도록 배치했다. 그는 고아였고, 어릴 때 수녀원에서 자랐으며, 어릴 때 우연히 성당 복원 작업을 돕기 시작하면서 점차 미술, 건축, 조각 등 예술 작품 전체의 역사, 작품의 제작 기법과 기술, 재료의 시대적 차이, 작가들의 사소한 습관과 특징 등을 통해 진품을 판별하는 공부를 하게 된다. 

올드먼은 대학에서 18세기에 만들어진 움직이는 로봇인 '보캉송 로봇'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데, 이 '보캉송 로봇'은 영화에서 소소한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 '보캉송 로봇'이 모든 사건의 핵심이다. '보캉송 로봇'은 실제하며, 자끄 드 보캉송은 1709년에 태어나 1782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발명가이면서 예술가다. 그가 만든 움직이는 로봇은 시대를 앞서간 혁명적인 기계 장치로, 우리가 생각하는 '로봇'의 초기 버전이다. 올드먼은 '보캉송 로봇'을 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았고, 그가 휘말리게 되는 사건에서 '보캉송 로봇'은 결정적 트리거가 된다.


어느 날, 올드먼이 이상한 고객의 전화를 받는다. '이벳슨 빌라'의 주인이라는 한 여성의 전화인데, 부모가 돌아가셔서 빌라에 있는 모든 미술품을 팔고 싶다는 전화였다. 올드먼의 성격으로는 결코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는 상대였으나, 올드먼은 어느 순간 '이벳슨' 빌라를 방문하고, 저택 안에 있는 많은 예술품을 보면서 흥미를 느낀다. 빌라 주인인 여성은 모든 판단을 올드먼에게 맡긴다고 했고, 건물을 둘러보던 올드먼은 지하 창고에서 낡은 기계 부품을 발견한다. 올드먼은 직감으로 그 기계 부품이 '보캉송 로봇'과 관련 있다는 걸 알아챈다. 

지하 창고에서 발견한 '보캉송 로봇' 부품들,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이벳슨 빌라'의 주인 이벳슨의 정체를 두고 올드먼은 강렬한 호기심을 갖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벳슨이라는 개인에게 접근한다. 로봇 부품이 올드먼의 전공에 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이벳슨은 올드먼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여성'이라는 대상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었다. 올드먼은 자신이 판단하고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판단하고, 선택하도록 마당을 펼치고, 분위기를 만들고, 먹잇감을 제공한 누군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데, 그게 올드먼의 한계다. 올드먼은 이미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고, 자신을 떠받드는 사람이 많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성공한 대부분 사람이 그렇듯,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믿으며,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 올드먼의 약한 고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굴까.

영화에서 조연으로 비중이 작은 세 사람이 나온다. 주인공인 올드먼과 이벳슨이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사실 두 사람은 '보캉송 로봇'과 같은 존재다. 올드먼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고, 이벳슨은 철저하게 연기를 했을 뿐이다. 기계제작자 로버트는 올드먼의 충실한 조언자로, '보캉송 로봇'을 조립하며, 완성을 향해 한 단계씩 발전하는 모습을 올드먼과 함께 보며 즐거워 하고, 남성끼리의 우정을 나누는 사이로 그려진다. 

올드먼의 오랜 친구 빌리, 이벳슨 빌라의 관리인, 이벳슨 빌라 앞에 있는 카페에 늘 상주하는 작은 키의 독특한 기억력을 가진 여성. 세 명의 다른 인물은 공통점이 없지만, 올드먼의 선택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빌라의 관리인은 한 쪽 다리를 절면서 묵묵히 이벳슨의 심부름을 하며, 집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의 묵묵함은 충실함과 함께 많은 비밀을 간직한 걸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이벳슨 빌라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면서, 관리인도 사라지는데, 그가 진짜 다리를 저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이벳슨 빌라 앞 카페에 상주하며, 온종일 창밖으로 거리를 내다보는 여성은 키가 작다. 보통의 평균 사람과는 다른, '왜소증'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여성은 비상한 기억력과 숫자에 관한 탁월한 기억을 가졌으며, '이벳슨 빌라' 밖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움직임을 사진처럼 이미지로 가지고 있다. 모든 상황이 끝나고, 올드먼이 카페에 찾아와 망연자실하며 이벳슨의 행방을 물을 때, 이 여성의 증언은 올드먼의 영혼을 파괴한다.

올드먼의 친구인 빌리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올드먼의 혹평으로 작품 활동을 포기한 인물이다. 그는 올드먼을 도와 경매에서 올드먼이 선택한 작품을 대신 구매하는 역할을 맡는다. 수백 만 유로의 작품을 헐값으로 사 들이는 올드먼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심부름을 한 대가로 푼돈을 받으며 살아가는 빌리는 올드먼의 친구라고는 하지만 하인이나 마찬가지 존재다. 빌리는 마지막까지 올드먼에게 충실한 친구로 남는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본 관객은 이 영화에서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올드먼의 삶을 파괴하는 설계자가 누굴까.


다른 방향에서 보면, 올드먼과 빌리는 한 사람이 갖는 두 개의 인격으로 보인다. 빌리는 올드먼의 그림자로 살아가지만, 올드먼이 하지 못하는 사회 생활의 다양성, 욕망의 실현,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쌓인 울분, 자기 재능을 무시당한 분노, 복수에 불타는 적개심의 현현이 빌리가 아닐까. 영화에서는 올드먼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예술 작품을 몽땅 도둑 맞는 걸로 나오지만, 그 작품을 소유하는 건 빌리라는 점에서, 올드먼과 빌리가 두 개의 인격을 가진 하나의 인물이라는 설득력을 갖는다. 

마치 '파이트 클럽'에서 주인공과 타일러가 만나 불법으로 격투를 하는 '파이트 클럽'에서 사람들과 싸우며 완전히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올드먼은 겉으로만 보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가 성공하기까지 스스로 억압했던 수 많은 삶의 다양성을 체험하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올드먼이 60대가 될 때까지 여자를 한 번도 만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게 드러나는데, 이건 올드먼에게 치명적인 위험으로 작용한다.

올드먼의 내면에 잠재한 욕망은, 사랑하는 여성을 만나 연애도 하고, 결혼해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아이도 한두 명 낳아 기르고, 주말과 휴일에는 외식도 하고, 가끔 외국으로 여행도 다니는, 누구나 하는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올드먼은 자기가 이루지 못한 욕망을 대신해 값비싼 작품들 가운데 여자의 초상화만 모아 방에 가득 붙여 놓고, 그 초상화를 바라보며 대리만족을 느끼지만, 그게 허상이고, 텅 빈 욕망이라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렇게 충족하지 못한 욕망을 실현하려고 '빌리'라는 새로운 자아를 만들게 된다.

현상적으로는 올드먼이 빌리에게 크게 한 방 맞고 넉아웃 되는 걸로 나온다. 그렇게 해석해도 이 영화는 재미있다. 잘 나가면서 오만한 올드먼의 인생이 한 순간에 터져버리는 결말은 반전이면서 통쾌함을 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서사가 완성될 수는 없다. 올드먼은 '이사벨'(이벳슨)이 남긴 말을 기억하고,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낸다. 올드먼이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사벨일까, 빌리일까.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이사벨은 배우일 뿐이고, 올드먼을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알 수 없다. 빌리는 올드먼의 또 다른 인격이므로, 그가 나타난다면 올드먼은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나타나지 않으면 올드먼은 현실의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올드먼이 모든 걸 잃었다고 해도, 그건 그의 일부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탐욕과 욕망을 잃었다. 그걸로 죽을 정도는 아니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가 느끼는 상실감이라는 건 설계된 사랑과 소유한 그림들일 뿐이었으니, 그가 삶의 본질을 깨닫고 각성한다면, 그가 잃은 물건들의 가격이 높아서 '자본주의적'으로 절망하는 이유말고는 불행할 다른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가 잃어버렸다는 그림들도 모두 '빌리'가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니, 그는 또 다른 인격체인 빌리를 통해서 그림을 찾거나, 실제로 '친구'인 빌리의 배신으로 친구도, 그림도 모두 잃었다면, 그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태도의 결과이므로 자신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일이다. 어느 쪽이든 올드먼에게 교훈이 된다.


한 사람을 속이려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영화의 서사를 보면, 올드먼을 속이려는 누군가는 - 그 사람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일 수 있다 - 올드먼을 둘러싼 완벽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이벳슨 빌라'는 건물로 존재하지만, 그 빌라를 둘러싼 서사를 구축하고, 인물을 배치하고, 인물의 캐릭터에 개성을 부여하고, 올드먼이 알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 - 최소 몇 년 - 을 투자해 올드먼 가까이 배치하고, 올드먼 같은 깐깐하고 날카로운 전문가도 의심하지 않도록 미세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이벳슨 빌라' 지하 창고에서 발견하는 작은 톱니바퀴 부품은 시간이 지나면 함정이라는 걸 당연히 알게 되지만, 그걸 발견할 때는 올드먼도 그 부품이 떡밥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건 올드먼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이 설계했기 때문이다.

'보캉송 로봇'을 조립할 수 있는 기계기술자가 가까운 곳에 있고, 그 친구가 여자 문제까지 조언을 할 정도가 되며, 푼돈을 집어주면 모슨 일이든 해결한다는 올드먼의 오만한 생각과 태도에 맞춰주는 빌라 관리자의 연기 또한 완벽하다. 올드먼의 심리를 꿰뚫고, 올드먼의 부족한 지점을 활용해 올드먼이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람, 겉으로는 인생이 실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가 진정한 승자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티 오브 갓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