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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Oct 03. 2024

라스트 미션

라스트 미션


클린트 이스트우드 작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향해 치닫는다. 이혼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내의 장례를 마친 얼은 마지막 임무를 끝내지 못한다. 

마약단속국이 그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앞뒤로 그를 포위해 체포한다. 얼마 전, 마약을 운반하는 '할배'의 존재를 확인한 마약단속국 요원 콜린은 용의자가 모텔에 묵을 걸 알고 그를 찾았지만, 엉뚱한 사람만 잡는다. 우연히 그곳에서 만난 얼과 콜린은 인사를 하고, 간단하게 이야기도 나누는데, 이 짧은 대화는 나중에 '얼'이 체포되는 장면에서 다시 콜린을 만나는 장면과 이어지면서, 가정과 가족이 있는 남자들의 강한 공감대를 드러낸다.

'얼'은 처음 본 콜린에게, 살아보니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마침 콜린은 결혼기념일을 하루 넘긴 상황이어서 '얼'의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얼'은 콜린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지만, 그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인다. 남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고, 가장의 체면을 살리려고 밖에서 미친 듯 열심히 살지만, 정작 가족은 그런 남편, 아버지를 알아주지 않는다. '얼'은 일이 좋아서, 즐겁고 재미있어서 바깥으로만 나돌았고, 그 결과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자식들에게 버림받았다.

가족에게 인정 받으려고 '얼'은 죽음을 앞둔 나이에 마약 밀매 운반을 하며 돈을 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손녀 결혼식을 치르고, 차압당한 집의 저당을 풀고, 참전용사회 건물을 리모델링 하는 데 쓴다. '얼'이 아내 곁을 지키지 않았다면, 당장은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미 마약 조직 내부에서 구체적 정보를 받고 있던 '마약단속국'은 언젠가 '얼'을 체포하겠지만, 무려 일주일 이상 나타나지 않은 '얼' 때문에 마약 조직은 이성을 잃었고, 그들의 정보가 쉽게 마약단속국으로 흘러갔다.

'얼'은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 가족을 얼마나 무시하고, 가볍게 생각했는가를 깨닫는다. '얼'은 자기 직업(원예사)이 좋아서 열심으로 일을 했을 뿐이지만, 그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고, 이기적인 인간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딸의 결혼식에 가지 않은 것도, 꽃 품종 전시회와 시상식 때문이었고, 그렇게 아내와 딸에게 버림받은 '얼'은 결국 인터넷으로 원예 사업하는 후배들에게 밀려 농장이 파산한다.

'얼'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가족에게 버림 받은 삶, 농장은 은행에 차압당하고, 낡은 트럭 한 대에 남은 낡은 물건이 전 재산인 비루한 삶이 거기 있었다.

'얼'은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도 살아 남은 '역전의 용사'였으나, 현실은 전쟁보다 더 힘들고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어 생존하기 어렵다. 그는 열심히 살았으나 파산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으나 가족에게 버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 아내의 말도, 딸의 말도 듣지 않았으며 오로지 독불장군으로 살았다. 우리는 그런 남자를 '마초', '상남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남자를 부르는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


영화에서 주인공 '얼'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연방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그가 가장 잘 하고, 즐겁고, 행복한 원예 일을 한다. 그는 마침내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팠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대가로 자유를 포기했다. 이 영화가 감독이면서 주인공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삶과 매우 닮았다는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모습은 '연기'가 아니라 그의 진심으로 보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사에 남을 배우이면서 감독이지만, 그의 시작은 형편 없었다. 그는 193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제임스 딘 뺨 칠 정도로 잘 생긴 외모를 가졌으나, 성격은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다. 그의 영화 이력 역시 형편 없었고, 최초의 주연 영화는 이탈리아 영화인 마카로니 웨스턴이었다. 그는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에도 출연하고, 영화의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근근히 경력을 이어갔고, 60세가 넘어서도 겨우 '서부 영화'의 주인공과 형사 '더티 해리'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사 '말파소'를 만들고, 자신이 직접 영화를 연출, 제작, 주연까지 하겠다는 의지를 비치자 주위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62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미 늙은 배우였고, 더 이상 새로운 삶을 살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전적 영화 '용서받지 못할 자'를 연출하고, 주인공 역으로 출연하면서, 그동안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알았다는 세계의 영화팬과 영화판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그렇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60세가 넘어서 화려하게 부활했고, 그의 삶은 멈추지 않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 많은 여성을 만나고, 헤어졌다. 그건 분명한 불륜이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몹쓸 짓이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사생활은 수 많은 여배우, 여성들과 바람을 피우는 시간이 많았고, 끈기 있게 참고 기다렸던 첫 번째 아내도 마침내 그를 버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60세가 넘어서야 정신을 차렸고, 딸보다 어린 여성과 결혼한 이후, 그가 직접 만든 영화제작사(말파소)에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났다.

이 영화 주인공 '얼' 역시, 복잡한 여자 관계만 없을 뿐, 이기적이고, 자신의 삶에만 충실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내와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평생을 보낸 '얼'은 농장이 파산하고, 가족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게 되자 뒤늦게 자기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마약 운송'을 통해 번 돈으로 가족에게 돌아가는 환승권을 구입한다. 그는 딸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손녀의 결혼식 비용을 대고, 차압당한 농장을 되찾아 손녀에게 맡기고, 마을의 참전용사 회관이 어려움에 놓이자 리모델링 비용을 지불한다. 

'늙으면 필터가 사라진 것처럼 거침 없이 말한다'는 건 나이 들면서 뻔뻔해지는 걸 말하지만, 그만큼 솔직하다는 다른 표현이다. 애둘러 말하지 않아도, 늙은이의 말은 알아서 해석할 것이고, 늙은이가 말을 삼가면 오히려 숨기고, 감추는 게 있지 않나 의심하게 된다. '얼'은 남성우월주의, 남성가부장 인물의 전형이며, 그가 살았던 지난 삶은 '거침 없이' 살았지만, 남은 건 버리고 떠난 가족의 원망과 눈물 뿐이었다. 멀리 떠나온 만큼 돌아가는 길도 멀다. '얼'은 뒤늦게라도 가족에게 돌아가지만, 그의 날개는 꺾이고, 죽을 때까지 높은 담장을 넘을 수 없는 공간에 갇힌다. 그럼에도 '얼'의 삶이 나쁘지 않은 건, 가족이 그와 화해하고, 자식들이 자기를 아버지로 불러주고, 면회를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는 타인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동력은 가족에게서 나온다. 나를 인정하는 유일한 집단이 가족이고, 가족이 있어 '나'가 (의미론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가족이 없다면 '유사 가족'이 생기고, 친구, 이웃, 지인들과 삶의 관계를 만들어 간다. 이런 관계 없이 오로지 혼자 살아가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없다. 외로움과 고독은 개인에게 치명적 질병이다. 주인공 '얼'이 필사적으로 가족과 관계를 복구하려 노력하는 장면들은 필사적이고 눈물겹다. 역설적으로 '얼'이 감옥에 갇혀 신체의 자유를 잃게 되어도 전혀 무섭거나 외롭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게 느끼는 장면은 그가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기를 찾아줄 가족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때문이다.


가족마다 '아버지'의 존재는 다르게 기억된다. 폭력적인 아버지, 다정다감한 아버지, 무심한 아버지, 잔소리 많은 아버지, 소심한 아버지, 권위적 아버지... 등등 아버지의 모습은 어느 한 가지 모습이 특징이면서, 여러 요소가 뒤섞인 복합적 모습이기도 하다. 어떤 아버지든, 그들의 운명은 비슷하다. 시간이 흐르고 자식들이 성장하면, 아버지는 쇠퇴하고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 과정을 인정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폭력적이거나 권위적인 모습으로 파멸하며,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버지는 '얼'과 같은 아버지가 된다.

'얼'은 젊어서 가족보다 꽃을 더 사랑했고, 그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 빋았다. 세월이 흘러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과거의 자기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물론 그는 가족에게 용서를 빌지 않는다. '얼'은 자기 방식대로 가족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행히 가족도 아버지 '얼'을 용서하고 가족과 아버지는 화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족'에 '아버지'는 소외된 존재라는 거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은 대가족, 중가족, 핵가족에 이어 지금은 1인 가족까지 있지만, 통념적으로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혈연을 '가족'으로 부른다. 그런데 '가족'에서 '아버지'는 늘 배제되어 있고, 가족에게 대상화 된 존재이며, 소외된 존재다. 이때 '소외된 존재'는 아버지를 배제한 가족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아버지' 자신이 선택한 존재론적 선택일 수 있다.

신화에서 '신'은 곧 아버지이며, '신'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지만, 모든 자식 신들에게 배척 당하고, 마침내 신의 권위와 권력을 빼앗기고 쫓겨날 운명에 놓인다. 숫사자가 홀로 평원을 떠도는 운명도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그 이전의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버지'의 자리에 올랐기에, 반드시 쫓겨날 운명이다. 시인 '이상'의 '오감도' 가운데 '시제2호'에서 '아버지'의 운명을 알 수 있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졸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남자는 '아버지'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버지가 되길 포기할 수는 있으나, 그건 곧 '남자'로서의 삶도 포기하는 걸 의미한다. '아버지'는 남자가 도달해야 하는 마지막 길이며, 그 길에서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얼'은 가족을 이루고 아버지가 되었지만, 아버지가 해야 할, 아버지로 살아야 할 삶을 살 지 않았기에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아버지'의 무게는 거슬러 올라가는 멀고 먼 과거부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하지도 않는, 영원히 없을 수도 있는 내 자식의, 자식의 멀고 먼 미래의 자식까지 한꺼번에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얼'은 멀고 먼 길을 돌아와 마침내 평온한 삶을 찾는다. 이때 '얼'은 영화 주인공의 캐릭터로서 '얼'이면서 또한 '얼'을 연기한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같은 인물이다. '얼'이 가족을 위해 범죄에 가담해 큰 돈을 벌어 가족에게 쓰고, 감옥에 갇혀 평온을 얻는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영화사 '말파소'를 만들고,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며 삶의 평온을 누린다. 비록 '얼'이 감옥에서 삶을 마감하더라도 '얼'은 자기가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얼'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마치 진짜 '얼'처럼, 고목나무 같은 굵게 패인 주름과 바싹 마른 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표정 없는 얼굴로 늙은 남자의 인생을 핍진하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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