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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스트

by 백건우

브루탈리스트


나찌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 온 헝가리계 유대인 라즐리 토트는 가구점을 하는 사촌을 만나고, 그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한다. 영화 중간 중간 다큐멘터리 필름이 나오는데, 이런 장치가 마치 이 영화가 실화에 바탕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창작이다. 라즐리 토트는 자신만 겨우 유럽에서 탈출했으나 그곳에는 아내와 조카가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 떨며 어딘가에서 숨어 지낸다는 것만 아는 상황이다. 두 사람을 미국으로 부르고 싶지만 자기 몸 하나도 돌볼 여유가 없는 토트는 피가 마르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우연히 사촌의 가구점에서 리모델링을 한 고객이 아버지 서재를 리모델링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토트는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 기존의 서재를 다 뜯어내고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으로 서재를 꾸민다. 이때 드러난 서재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신선하고 탁월한 아이디어와 디자인으로 감탄하게 되는데, 토트의 실력은 시간이 지나서 평가되고 알려진다.

서재의 주인이 엄청난 부르주아 자본가 해리슨이었고, 그의 서재가 유명 잡지에 소개되면서 극찬을 받자 부랴부랴 토트를 찾아나선 것이다. 해리슨은 토트의 과거를 조사해 그가 헝가리에서 유명한 건축사였고, 많은 프로젝트를 성공한 뛰어난 능력을 가진 건축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토트에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토트가 바우하우스 출신이라는 사실은 영화적 장치이긴 하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 바우하우스 출신 가운데 유명한 건축가들이 2차 세계전쟁 직전 또는 전쟁 중에 미국으로 건너왔고, 그들이 미국 건축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미국 건축의 특징은 1940년대 이전과 이후가 뚜렷이 갈린다.

1940년대 이전 미국 건축은 유럽 건축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주로 고딕 양식의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18세기(1776년)에 독립한 미국은 (백인 입장에서)신대륙 아메리카는 허허벌판이었다. 그들은 모두 유럽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었기에 삶의 양식은 유럽에서 배운대로였고, 건축 양식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특히 독일에서 기존 건축 양식에서 벗어나 혁명적 변화를 일으킨 주체가 '바우하우스'인데, 건축 뿐 아니라 산업디자인, 가구를 비롯한 거의 모든 디자인에서 '바우하우스'는 모더니즘, 미니멀리즘을 지향했다.

미국 건축에서 50년대부터 모더니즘, 미니멀리즘 건축이 크게 유행하면서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그런 맥락을 잘 짚으면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토트가 유럽에서 활약한 건축가라는 점이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는 건 분명하다. 토트는 유럽에서 성취한 건축가로서의 이름을 모두 잃었고, 미국에서 완전히 밑바닥에서 시작한다. 토트의 입장에서 미국은 낯선 땅이고, 가족(아내와 조카)과 떨어져 있어 외롭고, 서러운 나날이지만, 그는 어떻게든 미국에 적응하고 살아남으려 몸부림친다.

그가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면 평범한 노동자로 살았을 것이고, 특별한 서사가 만들어지기 어렵겠지만, 유럽에서 유명한 건축가로 활동했다는 배경이 있어 토트 개인의 서사가 중요한 의미를 담게 된다. 그가 미국에서 하는 건축 설계는 유럽에서 시작한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미국에 이식, 전파하는 행동이며, 미국의 건축 역사를 바꾸는 놀라운 사건이다.

그럼에도 토트 개인의 삶에서는 직업적 충만이나 보람보다는 유럽에 남겨둔 가족 걱정과 나찌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서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래서 토트는 마약을 하고, 무분별한 섹스를 통해 현재의 고통을 잊으려 하지만 현실을 잊고 살아갈 수 없다.


이 영화는 유럽현대사에서 독일 나찌의 만행, 나찌에게 학살당하는 유대인의 처지,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유대인 건축가의 삶을 통해 역사 속 개인의 존재가 고난을 겪으며 끝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헐리우드에서 무수하게 변주된 '유대인 피해자' 영화의 하나다.

헐리우드는 유대 자본에 영향을 받는 게 사실이고, 나찌의 만행(뒤집으면 유대인의 고난)을 다룬 영화가 무수히 많이 제작되어 세계 수 많은 나라에 배포되었다. 헐리우드는 '유대인 피해자' 영화를 통해 유대인의 역사적 행동을 합리화 한다.

유대인이 세운 국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잔혹하게 학살해도 '유대인 피해자' 세계관에서는 모든 게 용서되고 합리화 되는 현실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잔혹한 학살 행위를 뒤에서 지켜주는 미국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아무리 미국이 뒷배를 봐준다 해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행위는 변명할 수 없는 국가 범죄, 전쟁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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