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맨
제이슨 스타뎀은 가이 리치 감독 작품 '록 스탁 투 스모킹 배럴즈'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가이 리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가이 리치 이름을 널리 알린 데뷔작이면서, 감독의 독특한 연출(가이 리치는 CF 감독으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과 유명하지 않은 배우들의 놀랍고 뛰어난 연기로 이 작품은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제이슨 스타뎀은 가이 리치 감독 작품인 '스내치', '리볼버'에도 출연했고, 이후 꾸준히 여러 작품에 등장하며 확고한 주연으로 자리 잡았다. 그가 출연한 작품들은 주로 액션 영화로 제이슨은 통쾌한 액션을 보이는 인물로 강하게 인식되었다. 그가 '원맨'(단독 주연)으로 출연하는 작품에서 보이는 액션은 한국영화에서 '마동석'의 존재와 매우 비슷하다. 마동석이 특수반 형사로 마약, 불법 도박 같은 조직 범죄를 소탕하면서 강력한 육체의 힘을 발휘하며 범죄자를 일망타진한다면, 제이슨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주로 특수부대 출신으로 퇴직해 조용히 살아가다 우연히 어떤 사건에 휘말리며 제이슨이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이 영화 바로 전에 찍은 '비키퍼'에서도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도록 도와준 이웃집 아주머니가 보이스 피싱으로 큰 돈을 사기당하고 자살하자 주인공(제이슨 스타뎀)은 보이스 피싱 조직 뿐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거대한 마피아 조직을 박살낸다. 나는 제이슨의 데뷔작부터 최근작까지 많은 영화 가운데 액션 영화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영화는 거의 다 봤다. 그의 초기 작품인 '가이 리치' 감독 작품은 물론이고, '이탈리안 잡', '아드레날린24', '메카닉', '캐시트럭' 등이 제이슨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영화로 생각하고, 액션과 재미가 있는 영화로 생각한다.
그 사이에 더 많은 영화가 있지만, 이른바 '프렌차이즈 영화'에도 많이 출연해서 그가 단독 주연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강력한 액션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일부러 찾아볼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제이슨 스타뎀'에 관해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영화도 그가 단독 주연으로 나오는 여러 영화와 마찬가지로 혼자 마피아 조직을 박살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제이슨은 통쾌한 액션을 보이는데, 나는 제이슨의 액션도 훌륭하고 재미있게 봤지만, 이 영화의 바닥에 흐르는 '계급투쟁(class struggle)'의 상징성이 더 좋았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있고, 소설을 쓴 저자는 '배트맨' 시리즈의 작가인 '척 딕슨'이다. 척 딕슨의 소설 'Levon`s Trade'를 바탕으로 만들었고, 주인공 '레본'은 '배트맨'의 또다른 버전으로 해석해도 좋다.
레본의 정체성은 '노동자'다. 영화 제목이 '워킹맨'이라는 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국왕립 특수부대에서 몇 년 동안 복무했던 레본은 미국으로 건너와 건설현장 반장으로 일한다. 레본의 삶을 들여다 보면, 레본은 군 복무를 하면서 큰 돈을 번 사람은 아니다. 그의 집안 역시 부자가 아닌 걸로 보이고, 그의 아내는 우울증을 오래 앓다 결국 자살했다. 어린 딸은 장인이 맡아 키우고, 레본은 가끔(일주일에 두 시간) 찾아가 딸의 얼굴을 보고 올 뿐이다.
레본은 딸을 끔찍히 사랑하지만 함께 있지 못하고, 장인을 상대로 법정에서 딸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는 집도 없고, 차에서 자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그런 레본을 믿고, 일자리를 주고, 공사현장을 맡기는 건설회사 사장과 가족에게 레본은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이런 배경을 보면, 레본은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가치관에서 중요한 의미로 부여한다. 레본의 가족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 혈연, 진짜 가족, 2) 인연, 자신을 돕고 배려해 주는 건설회사 사장 가족, 3) 함께 일하는 동료, 현장 노동자들로 볼 수 있다. 레본에게 이 세 부류는 모두 '가족'이라는 범주에 들어간다. 그 이유는 영화에서 잘 드러난다.
공사 현장에서 작업을 시작할 때, 레본은 작업 반장으로서 자신이 현장 가족 즉 노동자 그룹의 보호자라고 인식하고 실제 그렇게 행동한다. 노동자 가운데 한 명이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들이 쳐들어 와 행패를 부릴 때, 레본은 그들을 제압하고 쫓아낸다. 레본의 기준에서, 공사 현장은 곧 레본의 '집'을 의미한다. 현장 노동자들은 '가족'이며, 공사 현장을 시작한 건설회사(가족 회사)의 사장 가족 역시 레본에게는 큰 울타리에서 한 가족이다. 이런 장소를 침탈하고 가족 같은 노동자를 폭행하려는 폭력배들을 응징하는 건 레본에게 의무이기도 하다.
사건의 시작은 레본과 직접 관련이 없다. 건설회사 사장의 딸이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으로 놀러갔다 실종되었고, 경찰이 실종 사건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사장 부부가 간절하게 부탁하고, 레본 또한 사장 부부의 딸 제니를 딸처럼 아끼는 마음이어서 레본은 처음에 사장 부부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지만(그는 폭력을 일부러 쓰려는 마음이 없었다) 제니를 구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는 직접 구출하기로 결심하고 사건 속으로 뛰어든다.
레본은 경찰이 해결하지 못하거나, 해결할 의지가 없는 사건 속으로 직진한다. 나중에 드러나지만, 경찰도 마피아에게 돈을 받아 먹으며 마피아를 돕는 한 패거리라는 설정도 나오는 걸 보면, 레본은 이미 경찰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는 제니가 실종된 나이트클럽을 감시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클럽의 뒷문 골목에서 제시가 지녔던 진주 귀걸이가 발견되고, 제시의 실종이 우발적 범죄가 아니라 조직적 범죄라는 확신을 하게 된 레본은 클럽을 운영하는 사람의 뒤를 밟아 그에게 범죄의 단초를 확인한다.
이 사건의 본질은 '인신매매'이면서, 인신매매 조직을 운영하는 '울로'가 러시아 마피아 중간 보스의 아들로, 강력한 폭력을 바탕으로 마약, 인신매매 등 온갖 불법을 저지르며 떵떵거리고 부와 권력을 누리고 살아가는 부르주아라는 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러시아 마피아 조직의 중간 보스 이상 간부들을 보면, 미국(영화의 무대는 시카고)에서 최상류층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에서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범죄를 저지르며 획득한 재화로 상류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유명한 재벌들인 듀퐁, JP 모건, 록펠러, 카네기 등은 정부를 상대로 사기를 치거나 담합하는 방식으로 막대한 이윤을 남기면서 재벌이 되었다. 미국의 '합법적'인 재벌들이나 '금주법 시대'에 밀주를 만들어 팔던 알 카포네 같은 마피아 조직이나 모두 불법을 저지르며 막대한 이윤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자본가와 부르주아를 바라보는 인식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레본은 가장 말단 조직원 하나를 잡아 정보를 캐내고, 마약이 유통되는 경로와 조직을 찾아낸 다음, 곧바로 러시아 마피아의 중간 간부 집을 찾아 들어가 그를 고문하고 살해한다. 즉 레본은 벌집을 건드린 것이다. 러시아 마피아 조직은 비상이 걸리고, 러시아 지부장은 레본에게 죽임을 당한 두 아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조직 최상층부에 알린다. 레본은 자기가 죽인 러시아 마피아 중간 간부 뒤에 조금 과장하면 '하나의 국가'로 표현할 정도로 큰 폭력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지만, 레본의 성격이라면 상대가 누구라도 목숨을 걸고 싸웠을 것이다.
인신매매 조직을 운영하는 두목은 러시아 마피아 지부장의 아들 울로였고, 울로는 조직에서 이탈해 독자적으로 범죄 조직을 만들어 인신매매와 마약을 파는 범죄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때 사건의 본질은 인신매매를 하는 울로 조직이 '공급책'이라면, 여성을 납치한 걸 알면서도 자신의 쾌락 수단으로 꺼리낌 없이 돈을 지불하고 납치된 여성을 성적 도구로 학대하는 자들이 '소비집단'이다. 영화에서 노동자인 레본이 최종 범죄 결과의 소비자인 '부르주아 또는 자본가'를 만나지는 않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른다.
레본이 인신매매 조직의 본진으로 쳐들어가 보이는 액션은 말 그대로 액션 카타르시스, 액션 오르가즘으로 표현할 수 있다. 레본과 제니 두 사람을 제외하면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깨끗하게 청소해야 할 쓰레기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납치 당한 제니의 처지를 살펴보면, 제니는 납치 당한 이후에도 줄곧 당당하고 주눅들지 않는 모습으로 나온다. 폭력의 공포 앞에서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여성 클리셰를 보이지 않는 모습에서, 이 영화가 지향하는 정서가 드러난다. 즉, 범죄(자)와 타협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며, 주눅들지 않고, 반드시 범죄자를 응징하고, 범죄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무관용 원칙이 영화 전반에서 잘 드러난다.
제니는 자신을 해치려는 범죄조직원과 싸우며 끝까지 스스로 폭력을 방어하고 자신을 지킨다. '레본'이 적들의 총격에 한 발도 맞지 않고, 총격전에서 그 많은 상대를 다 사살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액션이고, 클리셰가 맞다. 이런 부분을 영화에서 비판할 수는 있지만, 영화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노동자 레본이 납치당한 가족을 구하면서 범죄 집단인 부르주아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서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한발 더 나가면, 이 영화는 액션으로 껍데기를 씌웠지만,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무너뜨리는 상징성을 드러낸 영화로 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