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마스 앤더슨은 2014년에 토마스 핀천의 소설을 바탕으로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한국에서는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불과 284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다시 11년이 지나 폴 토마스 앤더슨은 다시 토마스 핀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고, 이번에는 심상찮은 분위기다.
토마스 핀천의 소설은 거대한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다. 그는 1960년대와 70년대, 80년대를 오가며 그 시대의 모습을 치밀하게 교직해 그린다. 그 시대의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는 반전, 히피, 마약, 명상 같은 비주류, 비사회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청년들 사이에서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었다.
미국에서는 2차 세계전쟁이 끝나고 쏘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에 맞서 '냉전'을 벌이고 있었고, 사회주의 이념은 미국에서도 청년들 특히 지식인과 대학생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캘리포니아주 바로 위에 있는 워싱턴주 시애틀은 아일랜드 공산주의자 본거지이기도 했다. 미국 서부는 동부 뉴욕과 달리 촌스럽지만 다양한 문화가 꽃피고, 동부 깍쟁이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자부심을 가진 지역이었다.
토마스 핀천이 시애틀에서 경력을 시작한 건 우연이지만, 시애틀과 캘리포니아의 역사성, 사회적 분위기는 그가 소설을 쓰는데 있어 중요한 영감을 얻는 곳이었다. 그의 소설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한국에서 번역이 안 된 작품이라 읽어볼 수 없었고, 영화로만 봤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이 소설을 2014년에 영화로 만들었고, 흥행에 실패했다.
영화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토마스 핀천의 소설 분위기를 잘 살렸지만, 대중성을 획득하기에는 부족했다. 하드보일드한 내용이고, 실제 연출도 그렇게 했으나 원작 소설의 흐름이 워낙 복잡하고, 70년대 캘리포니아 분위기가 온갖 문화가 뒤엉켜 용광로처럼 들끓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닉슨 대통령의 위태로운 상황과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있던 그 시대의 반동과 혁명적 분위기 속에 놓인 개인들의 삶이 어떻게 뒤엉키는가 잘 보여준다.
토마스 핀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서 흥행에 실패했는데, 10여 년이 지나 다시 같은 작가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 토마스 핀천의 새로운 소설이 워낙 흥미로워서? 감독 자신이 과거에 흥행에 실패한 굴욕을 만회하려고? 어느 쪽이든 폴 토마스 앤더슨은 성공했다. 그의 연출은 탁월했고 이 영화에 레오나드 디카프리오가 제작자로 들어온 건 금상첨화였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뛰어난 작품, 훌륭한 작품에 목말랐고, 토마스 핀천의 원작 소설을 읽은 다음, 이 작품을 폴 토마스 앤더슨이 연출한다는 걸 알고는 망설임 없이 투자했을 걸로 본다.
토마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는 1990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로, 한국에도 번역되어 출간했다. 6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로, 쉽게 읽히지 않는 소설이지만 소설의 재미는 상당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장황하고 복잡한 서사 가운데 필요한 내용을 간추려 흥미로운 서사를 만들었다.
소설에서는 1960년대와 1980년대를 오가는 이야기였지만, 영화는 1980년대와 2000년대를 오가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얼마나 많은 가난한 청년(백인, 흑인 모두)들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 없는 머나 먼 베트남 땅에서 명분도, 이유도 없이 베트남인들을 학살하거나, 그들의 총에 맞아 의미 없는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자칭 혁명가 그룹인 '프렌치75'의 리더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와 밥은 제국주의 미국을 상대로 무장 투쟁을 벌인다. 그들은 이민자 수용소를 습격해 이민자를 풀어주고, 건물에 폭탄을 설치해 폭파하는 등 무장 투쟁을 전개하지만 한국에서 70년대, 80년대를 보낸 세대가 보기에는 시시해 보인다.
5.18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영화들(꽃잎,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1980, 박하사탕, 26년)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들(남영동1985, 변호인, 1987, 서울의 봄)을 영화로 보는 건 물론, 그 시대에 직접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한국에서 미국의 혁명가들이 벌이는 행동은, 그들이 무기를 들고 무장 투쟁을 한다지만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는 느낌이다.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영화가 전개하면서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프렌치75' 리더인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는 결국 투쟁 과정에서 체포되고, 군과 정보기관의 심문 과정에서 증인보호 프로그램으로 들어가는 조건으로 정부에 협조한다. 즉 자기 조직과 조직원을 정부에 팔아넘긴다. 영화에서는 어떤 물리적 폭력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그건 감독이 확실하게 의도한 걸로 보이는데, 군과 정보기관이 반체제 무장 집단의 리더를 고문 한 번 하지 않고 오로지 말로 설득해서 조직의 비밀을 모두 알아냈다는 걸로 나온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한국의 70년대, 80년대에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앞에 적은 한국의 영화들에는 그 시대에 벌어졌던 상황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우리는 그 장면이 영화인줄 알면서도 고통과 분노를 느낀다. 그때 독재 권력은 반체제 지식인, 학생, 노동자들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프렌치75'는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의 자백으로 쉽게 와해되고, 조직원들은 쫓기는 신세가 되어 서로 연락도 하지 못한 채 개별적으로 숨어 지내지만 그들 대부분이 체포 또는 사살된다. 퍼디피아의 연인이기도 했던 밥은 둘 사이에 낳은 딸 윌라를 데리고 '박탄크로스'라는 도시로 숨어든다.
영화 초반에 보였던 혁명의 열정과 뜨거운 투쟁의 용기는 사라지고, 한때 혁명 그룹의 한 사람이었던 밥은 중년의 마약중독자로 살아간다. 16년 시간이 흘렀고, 윌라는 엄마 없이 그 시간을 살았다. 이들은 끝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나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퍼피디아와 개인적 관계를 맺었던 록조 대령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기면서 나비의 날개짓처럼 시간을 거슬러 다시 '팻'과 '윌라'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제 영화는 윌라, 밥, 록조 세 사람으로 연결된 운명의 끈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게 하는가를 지켜보는 과정이다. 윌라의 엄마 퍼피디아는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서도 홀연히 사라져 자취를 감췄고, '프렌치75' 단원들 대부분은 체포되거나 사살되었으며, 반체제 지하운동을 하는 조직은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되어 밥도 끊어진 선을 연결하는데 몹시 애를 먹는다.
록조 대령은 백인 순혈주의자로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로 행세하지만, 그는 과거에 퍼피디아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성관계를 맺었고, 퍼피디아가 낳은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믿고 있는 상황이다. 백인우월주의자 그룹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 가입하려면 록조의 혈연 관계가 순수한 백인이어야 하는데, 록조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짓을 인식하고 증거를 없애려 윌라와 밥을 쫓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세 사람의 쫓고 쫓기는 상황을 긴박하게 보여주면서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백인순혈주의 집단'과 '반체제 혁명가 집단'이 존재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극단적 집단이 과연 존재할까라는 의구심은 있지만, 미국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나라라는 점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배경이다.
윌라의 생물학적 친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아이러니가 영화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데, 록조는 윌라를 체포한 다음, 친자를 확인하는 키트로 윌라와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부녀 관계인지 확인한다. 여기서, 록조는 윌라가 친딸이면 살해하고, 친딸이 아니면 풀어준다는 말을 하는데, 이 역설적 상황이 록조의 극단적 이기심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백인우월주의자 그룹에 들어가려고 친딸을 살해한다는 발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록조는 그런 인간이다.
반면, 혁명을 하겠다던 밥은 퍼피디아가 사라진 이후 갓난 딸 윌라를 데리고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그는 마약중독이긴 해도 여전히 딸 윌라를 지키려는 의지는 강한 인물이다. 록조가 추격하면서 밥과 윌라의 생명이 위태로워지고, 과거의 행동이 현재를 타격하는 상황이 되면서 윌라는 자신의 출생과 부모의 삶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혁명은 이들에게 도달할 수 없는 무지개와 같은 존재다. 그것은 저 높은 곳에서 휘날리는 붉은 깃발이지만 결코 다가갈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환상이며, 그들도 혁명과 무장 투쟁이 달걀로 바위를 치는 행위라는 걸 모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려는 이유만으로 '혁명'을 꿈꾸고 이야기한다.
아버지 '밥'의 세대에서 '실패한' 혁명이 윌라의 세대에게는 어떻게 이어질까. 어쩌면 그들이 혁명을 꿈꾸는 동안 혁명은 실패하지 않았다고 봐야겠다. 누군가의 마음에 혁명의 불씨가 남아 있다면, 세상은 반드시 변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패한 혁명가 '밥'은 딸 윌라를 안전하게 키운 것으로 혁명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혁명적 임무란 세대를 이어 혁명의 전선에 뛰어들 혁명의 핏줄을 연결하는 게 아니었을까. 록조는 결국 실패하지만 밥은 윌라가 혁명 전선에 뛰어들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건 부모라도 말릴 수 없는 역사적 임무이자 의무가 아닐까를 생각했다면 '밥'은 혁명가로서 임무를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윌라가 '밥'을 '진짜 아빠'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트럼프가 군림하는 미국의 현실과 맞물려 이 영화는 미국 사회가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보인다고, 보여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하다. 백인우월주의, 백인순혈주의가 준동하고, 국가 권력자가 극우 파시즘을 옹호하는 상황에서 노동자 서민은 피부 색깔보다 더 계급 차별, 계급 불평등 아래 짓밟히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에서는 혁명 단체 단원들이 이민자 수용소를 습격해 갇혀 있는 이민자들을 풀어주지만, 현실에서는 트럼프가 유색인종, 불법체류자를 폭력으로 체포, 감금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제 미국 사회는 거대한 두 줄기 갈래로 나뉘고, 백인우월주의자와 맞서 싸우는 시민 세력이 과연 내전으로 폭발할 것인가를 눈여겨 보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보다 더 잔혹한 현실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미국은 심각한 상황이다.
영화는 희망을 말하고, 시민의 승리를 예견한다. 그건 역사에서도 기록된 결과들이다. 지금은 백인우월주의, 군산복합체, 금융자본의 폭력과 당근으로 고개를 들지 않는 미국 민중이지만, 그들에게는 '총'이 있고, 수정헌법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은 영국을 상대로 무장 혁명을 일으킨 국가이고, 자본과 노동 계급의 투쟁으로 성장한 사회다. '밥'과 같은 사람들이 수 없이 많고, '윌라' 같은 청년 역시 무수히 많다는 사실이 곧 미국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