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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탄 소년

by 백건우


자전거 탄 소년


다르덴 형제 작품. 한 사람의 삶에서 특히 어린시절의 경험은 인생 전체에 깊은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하다. 주인공 시릴은 열한 살의 어린이인데, 그가 겪는 일상은 잔혹하다.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인 스웨덴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보호센터에서 지내다 주말 위탁모 사만다와 함께 살아가는 시릴의 삶을 들여다보며, 관객은 몇 가지 곤혹스러운 점을 느낀다.


가난은 사람의 영혼을 갉아 먹는다는 말이 있다. 선진국 스웨덴에서도 시릴의 아버지는 자신이 타던 자동차(BMW)와 아들 시릴이 타던 자전거를 팔고, 아들에게 연락을 끊고 사라진다. 내용으로만 보면 시릴의 아버지는 무책임하고 가난한 사람이다. 그는 일자리를 얻었지만, 아들 시릴을 돌볼 생각은 없어서 주말 위탁모인 사만다에게 "아들은 필요없다"고 말한다. 가난이 시릴의 아버지 영혼을 갉아 먹었을 수 있다. 어떤 이유든 자식을 버린 시릴의 아버지 태도는 용납할 수 없으며, 용서받을 수 없다. 시릴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가난해서 시릴을 돌볼 수 없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그렇게 보자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 부모가 자식들을 알뜰살뜰 돌보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릴의 젊은 아버지가 보이는 태도는 냉정하다. 자기 자식을 대하는 태도가 가식적이고 냉랭한데, 정작 시릴은 어떻게든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어한다. 마침내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다는 걸 확인하게 되는 장면에서, 시릴이 보이는 행동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충격과 안타까움으로 시릴의 행동을 보는 관객을 대신해 시릴의 마음을 다독이는 사람이 위탁모 사만다다. 사만다는 남자친구가 있지만 시릴을 돌보게 되면서, 시릴의 반항적 태도를 싫어하는 시릴의 남자친구가 "나야, 시릴이야"라고 물을 때, 시릴을 선택하자 사만다를 떠나 결국 사만다는 사랑하는 남자도 떠나고 시릴만 돌보게 된다. 사만다는 왜 남자친구보다 시릴에게 더 마음을 쓰게 되었을까. 시릴의 반항에 힘들어 하던 사만다가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을 보면, 사만다에게도 말하지 못한 과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만다는 끝까지 시릴을 끌어안는다.


우리가 '유럽'을 떠올릴 때, 그들의 삶이 철저하게 '개인주의'를 추구한다고 알고 있다. '개인주의'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국가, 사회, 가족 등 크고 작은 집단에서 '개인'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개인의 삶, 개인의 생각, 개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우선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개인주의'는 개인의 인권을 말할 때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지만 시릴의 아버지처럼, 자기의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자기 자식마져 버리는 것이 '개인주의'라면, 그런 개인주의는 비난받아야 한다. '개인주의'가 다른 모든 가치보다 앞서거나 위에 있다는 망상이 곧 '이기주의'다. 가족보다 '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최소한의 공동체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극단의 이기적 태도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도 않지만, 도움 받을 자격도 없다.


유럽 사회(미국을 포함한)가 '개인'이 중심이 되기 시작한 건 근대 이후다. 유럽도 과거 봉건시대와 그 이전에는 가족을 비롯한 마을공동체가 중요한 구심점이었다. '개인'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였으며,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개인'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아시아는 전통적으로 가족과 마을 중심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점차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다시 1인 가족으로 해체되는 걸 볼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등장이 유럽만의 특징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촉수가 닿는 곳은 '개인'만 살아가도록 만드는 분열과 해체가 발생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시릴의 처지를 보면, 어릴 때부터 엄마 없이 자란 걸로 보인다. 여러 추측을 할 수 있지만, 아버지가 매우 젊은 걸로 봐서 시릴을 낳을 때 20대 초반 또는 10대 후반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아직 어린 청춘남녀가 사랑을 했지만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거나, 출산하고 시릴의 엄마가 일찍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시릴을 출산하고 아이와 남편(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더라도)을 버리고 떠났을 수도 있다.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시릴을 키운 건 젊은 아버지였고, 그도 삶이 곤궁한 처지가 되어 결국 자식을 버리고 떠나고 말았다.


시릴은 엄마 없이 자랐고, 한동안 보호센터에서 지내야 했으며, 주말 위탁모를 만나 함께 살게 된 게 행운이었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비록 남이긴 해도 엄마 역할을 하는 사만다를 만나 위기를 넘긴다. 사만다도 마음에 그늘이 있겠지만, 그는 미용실에서 일하며 비교적 온전한 일상을 영위한다. 그런 사만다가 우연히 시릴을 만나고, 위탁모가 되기로 마음 먹은 건, 시릴의 처지를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사만다는 그런 말을 하지 않지만, 시릴이 겪고 있는 잔혹한 시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공감한다. 누구에게나 가장 힘들 때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꼭 한 사람만 있어도 슬픔과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기댈 누군가 필요하다. 혈연은 자연스럽게 이런 감정을 공유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가족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가족에게 배신을 당할 때 더욱 큰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가족이 아니어도 마음을 터놓고 말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누군가 있다면 그 사람이 곧 가족이 된다. 수 많은 영화, 문학에서 '유사 가족'이 등장하는 이유도, 혈연 만큼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타인이 곧 가족이라는 걸 공감하기 때문이다. '개인'으로 파현화 하는 사회에서 혈연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삶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고, 감정, 정서도 나눌 수 없다면, 혈연이 아닌 누군가에게 더 따뜻하고 편안한 공감대를 나눌 수 있다면, 그 상대가 곧 가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시릴은 사만다를 엄마로 여기게 된다. 시릴이 간절하게 가족을, 엄마를 찾는 만큼이나 사만다도 가족이 필요하고, 우연히 시릴을 발견했다. 결국 두 사람은 엄마와 아들로 가족을 만들어 간다. 시릴은 자기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원한이 뼛속까지 맺히겠지만, 그건 마음 속 깊이 묻어두고, 현실에서는 사만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다. 두 사람이 함께 자전거를 바꿔 타고, 해변에서 수영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되는 건, 시릴과 사만다가 이제 엄마와 아들, 가족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미래를 암시한다. 그런 면에서 시릴은 퍽 운이 좋은 소년이다. 그의 현재는 안타깝고, 괴롭지만 그에게 사만다가 있고, 미래가 밝아보이기 때문에 관객은 무거운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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