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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현 Mar 17. 2023

트래픽


“새로운 기술이 일으키는 가장 명백한 폐쇄 혹은 심리적 결과는 바로 그 기술에 대한 수요다. 자동차가 생겨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자동차를 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 자체에 대한 수요를 창조해내는 기술의 힘은, 무엇보다도 기술이 우리 자신의 신체와 감각들의 확장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 우리 자신의 신체의 확장물들을 정말로 저기 바깥에 있는 것, 우리와는 전혀 별개인 것으로 간주하는 나르시스적 태도를 취하는 한, 우리는 모든 기술적 도전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마치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진 것처럼 버둥대다가 결국엔 붕괴하고 말 것이다.”

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자크 타티의 영화 속 대중들은 귀엽다. 이 속성은 그들의 불완전함에서 온다. 이들은 쉬운 길을 눈 앞에 두고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하고 한순간 집중력을 잃어 하던 일을 잊어버리거나 어처구니 없는 착각으로 인해 엉뚱한 반응을 보인다. 그런 모습에도 우리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 우리도 종종 우스운 짓들을 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남들의 실수나 어리석음에도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이다. 공감력의 핵심은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감정 속에서 자신을 일정 부분 확인하는 자기 투영적 심리다. 만약 타인의 잘못에 대해 과도하게 비판하게 되면 이는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것과도 같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모두 그러한 불완전함에 공동 지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만큼 타인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푼다. 엄격한 기준을 고수하는 대신 사람들은 기꺼이 상대방의 빈틈을 허용하게 되는데, 그 공간이 비어있는 것 또한 참을 수 없으므로 이를 다른 무엇으로 채워놓는다. 그것이 바로 귀여움이다. 타티는 타인에게서 귀여움을 포착할 수 있는 인간의 재능에 매료된 사람이다. 이는 그의 영화를 끌고 가는 동력인 동시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며, 여러가지 형태로 변주된다. 그리고 바로 귀엽다는 인식의 대상이 인간을 넘어 확장되는 순간, 우리는 그의 야심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타티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더 거대하고 의미심장한 작업을 하고 있다.


예시부터 들어보자. <트래픽>의 후반부에는 비 내리는 암스테르담의 도로 위에 자동차를 탄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 때 와이퍼의 움직임이 재미있다. 몸집이 큰 중년 신사가 탄 차의 와이퍼는 어딘지 거만하게 원호를 그리고, 수다스러운 여자 둘이 탄 차의 와이퍼는 그들의 손동작에 맞춰 요란스럽게 차창을 닦는다. 반대로 노인이 탄 차의 와이퍼는 그와 마찬가지로 영 맥아리가 없다. 이 장면에서 사람들과 자동차들을 분리시킬 수 있는가. 오히려 사람들이 가진 고유한 개인적 특성들이 소유한 자동차들에까지 전이되어 그들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와이퍼들의 이상한 궤적들은 이들의 기본 설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영화 초반부 타이틀 장면에서 등장하는 제조 과정이 이를 증명한다.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분업을 통해서 극한의 효율화를 추구한다. 기존에는 한 대의 자동차를 한 개의 팀이 꼬박 매달려 만들어 냈다면, 이제는 이 프로세스가 단계별로 나뉘어 여러 조립 라인에서 다수의 자동차가 동시에 만들어진다. 반복된 작업은 일의 능률을 이뤄내지만 반대로 인간성은 소멸되고 획일화된 체계를 떠받드는 톱니바퀴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 물론 이런 냉소적인 시각은 이미 찰리 채플린이 수십년 전 그의 풍자극들에서 다뤘던 것이다. 타티는 조금 다르게 접근한다. 그는 이 시스템에서 장인이 부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장인이란 일정 수준의 전문성과 노하우, 그리고 철학을 갖고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다. 장인은 효율성보다는 작가주의적 자의식으로 작업한다. 그러므로 그가 만드는 물건의 가치는 바로 그의 개성을 반영할 때 나타나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그의 불완전함까지도 수용한다는 의미다. 타티는 현대의 공장 시스템이 장인을 구조적으로 배척했다고 본다. 노동자들은 철학은 커녕, 사고를 할 필요조차 없어졌고, 그 결과 물건에서도 불완전함의 여지가 사라졌다. 생산이 완료된 자동차들은 미끈하고 날렵하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오류를 최소화하여 구축된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포드주의자들은 공정 표준화를 통해 사람과 기술을 분리시키는 것은 물론, 이들의 거리를 더 벌려놓아 불완전함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는 완벽한 통제를 꿈꿨다. 양산 체계는 단가 하락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이뤄 수많은 공산품들을 쏟아냈다. 이는 시장 수요를 만들어 더 많은 자동차들의 판매를 이끌어냈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정부는 전국의 교통망을 대거 확충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장인이 개입할 틈은 없다. 완성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주는 왠지 모를 위화감은 바로 이 장인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이에 대한 자크 타티의 처방은 간단하다. 장인을 다시 투입시키면 된다. 그것도 한없이 엉뚱하고 실수투성이의 장인 말이다. 윌로씨는 여전히 트레이드마크인 중절 모자와 트렌치 코트, 그리고 우산과 함께 등장하지만, 이번에 그는 한 자동차 회사의 디자이너다. 초반부에 보았던 공장과는 달리, 이곳의 시스템은 허술하다 못해 전무하다. 작업장은 어수선하며 노동자들은 정해진 프로세스 없이 즉흥적으로 일한다. 이들은 사다리 조차 없어서 서랍장으로 이를 즉석에서 대체하는 아마추어들이다. 한쪽에서는 무언가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것 같은데 다른 한쪽으로 가면 와르르 무너지고 있다. 이들의 혼란한 작업 체계는 가내수공업에 더 가까우며, 앞서 보았던 대량 생산 시설과 명백히 대비된다. 이 회사의 이름은 다르다는 의미의 접두사인 알트라 (Altra)다. 네이밍부터 대안적 가치를 표방하는 이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현대 시스템의 반대급부를 지향하는데, 이 회사의 제품이 캠핑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도시를 벗어나기 위한 목적의 자동차 아니던가. 우리의 장인 윌로씨는 본인의 온갖 유별난 아이디어들을 접목하여 세상에 둘도 없는 캠핑카를 설계한다. 차의 전면 라디에이터 그릴은 바베큐 그릴로 바뀌어 스테이크를 굽는데 사용되고, 트렁크의 문은 피크닉 테이블과 의자로 변신하는가 하면, 갑자기 닥스훈트 마냥 차의 허리가 쭉 늘어나 잠자리 공간을 만든다. 우리는 생뚱맞기 짝이 없는 이 캠핑카에서 윌로씨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알트라의 퍼스널리티를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비록 상상했던 모습은 아니지만, 생산된 제품이 그의 설계자와 꼭 닮아있다는 대목에서 타티의 장인 복원사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공급의 영역에서 대안적 가치를 보여주었다면, 그 다음은 수요다. 누가 캠핑카를 필요로 하는가. 일단 윌로씨의 일행은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가면 알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곳에서 캠핑카를 선보이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이들의 여정은 역시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다. 화물 트럭은 고장나거나 연료가 떨어지고, 막판에는 교통 사고에 휘말리는 등의 돌발 상황들이 벌어지면서 도착이 지연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우회 루트를 거쳐간다. 박람회에 가는 도중 붙잡힌 세관 사무실에서 제품 시연을 하는가 하면, 자동차 수리공의 집에서 머물며 소풍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와중에 캠핑카는 오히려 그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작동한다. 앞서 말했듯이, 캠핑카는 바쁜 도시의 삶에서 잠시 벗어나 여유를 즐기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말이다. 달리 보자면 이는 윌로씨의 일행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박람회로 가는 직선 도로에서 여정을 시작했으나, 본의 아니게 그 길을 탈선하게 된 그들의 모습은 불안하지 않고, 반대로 즐겁고 느긋해 보인다. 본인들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윌로씨와 그의 동료들은 캠핑카에게 가장 어울리는 소비층 - 그들 자신 - 을 찾는데에 성공한다. 이 역시 상상했던 모습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누려야 하는 모습에 더 가깝다는 타티의 주장은 어렵지 않게 수긍이 간다.


그렇다면 <트래픽>은 현대적 생산 시스템과 소비 사회로부터의 일탈을 제안하는 영화일까.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어딘지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윌로씨의 일행이 우회 루트로 접어들게 된 계기가 갑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인해서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엄격한 관리주의와 과학 방법론을 통해 인간은 생산 시스템과 자동차,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늘 통제불능의 얼간이들에게 넘어간다는 점까지는 어쩔 수가 없다. 영화 속에서는 윌로씨의 와일드한 친구인 마리아가 난폭 운전으로 교통 경찰을 당황시키고, 그로 인해 도로의 질서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 연쇄추돌이 발생한다. 자동차들은 진흙탕에 빠져 뱅뱅 돌거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등 기본 설계와 무관한 오작동을 일으킨다. 물론 현실에서는 교통 사고가 일어나면 안되겠지만, 타티에게 이는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인간의 오류를 다시 시스템 속으로 불러오는 장치다. 다소 과격한 예시나, 교통 사고는 자동차의 발명 이래 늘 운명을 함께 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불완전함을 감추려고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켜와도 이는 형태를 이리저리 바꿀 뿐 절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타티는 사고뭉치인 인간이 도구까지 손에 쥐게 되면서 겉잡을 수 없이 일이 커졌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니까 기술과 문명은 인간의 연장선상이며 온갖 어리숙함, 허점 그리고 엉터리로 가득한 곳이다. 내재된 결함들이 우연히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터져나오게 되는 교통 사고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다시 환기시키는 이벤트다. 이후 자리를 잡는 교통 체증, 즉 트래픽은 어찌보면 이에 대한 숙연한 반성 같기도 하다. 타티는 막히는 도로 위의 차들과 운전자들의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 안에 담는다. 그는 기술과 문명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고장나면 나타나는 빈틈들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상대방의 허술함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적인 매력을 감지하고는 그를 귀엽다고 느낀다. 그 대상이 인간이든 아니든 말이다. 자크 타티는 기술주의자인 동시에 휴머니스트다. 이 문장에 일말의 모순도 없다는 것이 그가 평생의 작품 활동을 통해 얻어낸 빛나는 성과다. 윌로씨는 마침내 우산을 펼치고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그가 부재한 거리에서 보행자들은 멈춰선 자동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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