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브라운은 가만히 있을 여유가 없다. 연합군의 포화 속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후, 그녀의 남편 헤르만 브라운이 징집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헤르만은 한동안 실종 상태였기에 마리아는 그들의 결혼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그리고 그녀는 전후 독일을 살아가는 여성으로써 생존을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를 기다리면서 동시에 기다리지 않는다. 마리아의 불행은 바로 이 양가적 속성에서 비롯된다. 만약 그녀가 한쪽을 택할 수 있었더라면,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성립할 수 없다. 가령 마리아가 남편을 위해 조금만 더 기다렸을 경우, 무사귀환한 헤르만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녀의 남편을 버리고 미군 흑인 병사인 빌과 재혼했다고 치자. 이 부분도 입장을 명확히 한다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은 후에도 마리아는 자신의 혼인 상태를 수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빌과 섹스를 하려는 도중에 남편이 그 광경을 목격하는 사단이 나는 것이다. 몸싸움 끝에 마리아는 빌의 머리를 꽃병으로 가격하여 그를 죽인다. 재판장에서 마리아는 분명하게 말한다. 빌은 좋아했지만 헤르만은 사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헤르만은 자신이 빌을 죽였다고 그 자리에서 공언하여 그녀의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간다. 그들의 결혼은 그렇게 두번 유예된다. 한번은 전쟁에 의해서, 또 한번은 마리아의 의도치 않은 불륜에 의해서.
그렇다면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전쟁과 그 이후 사회의 격랑 속 독일 여성들의 기구한 운명을 다루는 이야기인가. 여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다. 그 중 하나는 딜레마의 순간들을 영화가 다루는 방식이다. 마리아가 빌을 죽이는 장면은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다부진 체격의 빌이 헤르만을 압도하려고 하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꽃병을 휘둘러 빌을 쓰러뜨린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속삭이며 그와 몸을 섞으려고 했던 그녀다. 결단에 앞서 마리아는 딱히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두 연인 사이에서 자동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한 셈이다. 여기에는 고민의 여지도 없고, 바로 기본값으로 수렴하는 듯한 기계적 관성만이 느껴진다. 이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선택의 기로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듯이, 파스빈더의 카메라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상황과 감정적 여파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분명 마리아 브라운은 불운하다. 수년의 기간 동안 그녀는 고생 끝에 단 며칠에 불과한 결혼 생활을 하고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는 이에 대한 일말의 감상주의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단 한번도 그녀를 애도하지 않는다. 즉 몰입의 대상과 지속적으로 선을 긋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쟁은 남녀 관계를 역전시킨다. 남성들은 전쟁터로 향하고 여성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군수산업, 건설업, 제조업 등 이전에는 진입장벽이 높았던 산업 분야에서도 일자리들이 생겨나며, 여성들은 이를 신속히 점유해나간다. 노동 시장의 변화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지원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생산활동에 참여하면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키운다. 높아진 경제력을 기반으로 국가와 공동체는 물론, 가정 내에서도 여성들은 실질적 중심으로 자리잡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의 상황은 다르다. 전쟁터에서 복귀한 남성들은 기존의 질서로 돌아가길 원한다. 그들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지위 복권을 요구했다. 불과 몇년 만에 남녀 관계는 다시 가부장적인 구조로 빠르게 재편된다. 그 시대적 운명 앞에서 여성들은 별다른 저항없이 스스로를 희생했으며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사회 구조는 이미 격변했음에도, 사람들의 의식은 모두 전쟁 이전 성관념에 머물러 있었던 셈이다. 마리아 브라운 또한 특별하지 않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온당한 여성의 위치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소망은 헤르만이 수감되는 순간 무기한 연기된다. 본의 아니게 마리아는 시대가 바라는 일반 여성으로써의 삶을 박탈당한다.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잘못 꿰어진 이 첫 단추로 인해 시작되는 영화다.
여기에는 마리아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위에 서술했듯이, 사건의 단초는 그녀가 빌과 가졌던 외도 아닌 외도다. 그러나 그 현장이 발각된 직후 그녀가 빌의 머리를 꽃병으로 내려치자, 헤르만은 그녀를 바로 용서한다. 정확하고 망설임 없는 판단으로 마리아는 자신의 정조를 증명해낸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결혼 생활은 다른 국면을 맞이하였으므로, 마리아와 헤르만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시 발버둥쳐야 한다. 사실 발버둥칠 수 있는 사람은 마리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속죄한 상태이니 마음이 한결 가벼우며, 이후 행보가 전부 남편을 석방시키기 위한 것이라 믿게 되므로, 일종의 지고지순한 동기를 확보한다. 기존의 가부장적인 가치를 지키는 동시에 사회 진출을 도모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최적의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마리아 브라운은 그렇게 전후 여성의 자기모순을 극복한다. 이는 위기가 아니라 도리어 기회다. 그녀는 프랑스 자본가 오스왈드의 정부가 되어 뛰어난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여 부를 축적하고, 전후 독일로 들어오기 시작한 서방 세계의 경제 접점들을 빠르게 선점하면서 출세 가도를 걷는다. 그녀의 남편이 감옥에 갇혀서 그녀만 바라보는 동안, 마리아는 당당한 기백으로 개인적인 성공을 쟁취한다. 물론 그를 위해서 말이다.
그녀의 남자들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것이 오스왈드와 그녀의 남편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딜을 가능케 했을 터이다. 마리아의 순간적인 판단 만큼이나 빨랐던 첫번째 용서와 달리, 헤르만의 두번째 용서는 감옥에 무기력하게 갇힌 채 남성으로써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주도권까지 아내에게 넘겨줘야 가능하다. 그는 오랜 숙고 끝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정 내린다. 그러므로 헤르만은 오스왈드의 제안 - 석방되더라도 오스왈드가 살아있는 한 마리아와 만나지 않는다면 유산의 반을 상속해줄 것 - 을 받아들인다. 그는 마리아를 위해 감옥까지 자처하여 간 남자다. 그러므로 그의 배신은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전후 독일 남녀 관계의 복잡한 이해타산을 품는 것으로 봐야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헤르만은 마리아의 출세가 신경에 거슬린다. 이는 그를 위한 적정선 그 이상이며, 출소 이후 정상적인 결혼 생활도 위협할 여지가 다분하다고 여겨진다. 포화 속에서도 그와 결혼을 결심하고, 그의 생환을 밤낮으로 기다렸으며, 감옥에 들어가자 그의 석방을 위해 홀로 고군분투한 여자라고 해도, 결국 그의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오스왈드의 유언장을 통해 마리아에게도 틀림없이 전달된다. 그녀는 말을 더듬고 허둥댄다. 엔딩 장면의 가스 폭발이 그녀의 실수였는지, 의도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는 인생의 마지막 몇 분 동안 마리아가 느꼈을 당혹스러움의 정도를 판별하게 할 뿐이다. 머리가 어떻게 되었구나, 마리아 브라운. 그녀의 자평 속에는 깊은 회한이 서려있다. 그녀는 자신의 주제를 아는 척 행동했지만, 실상은 달랐던 것이다.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소위 고삐 풀린 전후 여성의 예외적 서사 위에 독일의 현대사를 수놓는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유럽은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독일은 분단국가가 되어 냉전의 양 세력에 대항하는 완충지대로써 자리잡는다. 서독의 경우, 소련의 영토 확장을 경계한 미국의 마샬 플랜 (Marshall Plan)을 통한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단기간에 경제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서방 세계에 빌붙어 구축한 독일의 현대적 근간은, 당대의 일부 국민들은 물론, 후대의 젊은 세대들에게도 부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전쟁의 폐허를 능수능란하게 극복한 마리아의 일대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다. 그것은 먼저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거부당한다. 그리고 1977년에 영화를 만든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로 표방되는 그녀의 아들 세대에 의해 두번째로 거부당한다. 말하자면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은 적대감과 수치심으로 가득찬 부관참시인 셈이다. 가스 폭발로 인해 폐허가 된 그녀의 아파트 속에는 독일의 우승을 알리는 1954년 월드컵 중계 방송이 울려퍼진다. 참수의 현장을 승리의 축포와 함께 터뜨리다니 지독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