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도 형태가 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믿는 듯하다. 형태 뿐만 아니라 무게와 온도, 그리고 질감도 있다. 즉, 고독이란 물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고독이 커지거나 쌓이면 모든 잡동사니들과 마찬가지로 처치 곤란한 무엇이 된다. <토니 타키타니>는 엄밀히 말하자면 고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내는 난처하거나 무안한 순간들에 대한 영화다. 즉, 고독을 느끼는 인간이 솔직하지 못할 때 보이는 이상 행동 같은 것들이 이 영화에는 가득하다. 그렇다면 이건 일종의 모순이지 않을까. 공허함으로 마음 속이 가득 찬다면, 과연 그건 텅 비어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는가. 반대로 뭔가가 꽉 차서 내부를 이곳저곳 훼손시키고 있는 상태라고 봐야하나. 예컨대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인 쇼자부로는 후자였다. 그는 아내가 죽은 후 마치 원반 모양의 물체가 가슴에 박혀있는 것 같았다고 그 감각을 묘사했다. 다분히 의학적인 그의 진술에 다시 한번 고독이라는 실체가 눈 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마치 루빈의 꽃병처럼 삶의 한 가운데 자리잡은 그 텅 빈 공간이 우두커니 일어서서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그렇게 문득 소환되곤 하는 존재의 공백 (Negative Space)에 대해, 하루키는 늘 그렇듯 재즈 레코드를 듣는 와중에, 또는 샐러드를 먹다가 생각해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고독을 느낀다는 건 그러한 활동들이랑 사실 별반 차이가 없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그저 습관이 되고 마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토니 타키타니는 그런 일들에 익숙하다. 어쩌면 일반인들보다 더 재능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태평양 전쟁 당시 상하이 등지를 홀로 떠돌아다니다 그는 운 나쁘게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거의 모든 동료 수감자들이 처형을 당할 때 쇼자부로는 살아남는다. 그렇게 고향에 돌아오고 나서도 가족의 죽음을 알게 되고, 이후 결혼을 하지만 일찍 아내를 잃는다. 그런 아버지의 일대기는 고스란히 토니에게 넘어온다. <토니 타키타니>에서 두 인물을 한 배우가 연기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그들의 존재 양태가 다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큰 어려움 없이 토니는 그걸 스스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선천적 고독이다. 그것은 선천적 장애처럼 이런저런 불편함을 만들어내지만, 달리 비교 대상이 없으므로 크게 체감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혼자서 맥주를 따라 마시거나, 일러스트레이터 작업에 몰두할 때 그는 한치의 부족함도 느끼지 않는다. 모종의 견고함으로 그는 인생을 대한다. 그런 그의 앞에 에이코가 나타난다. 사이즈 7, 신장 161 센티미터 전후, 신발 사이즈 22의 여자 에이코는 그에게 삶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보였다. 토니는 사랑에 빠지자 비로소 자신의 결핍을 제대로 알아보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그는 에이코에게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그의 청혼을 에이코가 받아들이게 되자 둘은 부부가 된다.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게 되면서 그에게는 고독이란 것의 의미도 달라진다.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 밥상을 보며 그는 두번 다시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토니는 행복을 탐했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전과 달리 미세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 나비효과로 그들의 결혼 생활은 갑작스럽게 종료된다. 그는 그렇게 또 다시 고독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후천적 고독이다. 이는 이식 받은 장기처럼 낯설고 부자연스러우며, 온 몸의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는 깊고도 철저히 당황한다. 토니 타키타니는 본래 고독을 머금은 상태에서 단단해진 인간이었으므로, 자신이 이로 인해 당황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괴롭게 하는건 단순히 그의 고독만일까. 아내가 없는 집에서 그는 그녀가 옷장에 놓고 간 수백 벌의 명품 옷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 토니의 말마따나 새가 바람으로 온 몸을 휘감듯이 생전의 에이코는 옷들로 자신의 존재를 감쌌다. 그것은 그녀가 갖고 있는 공허함을 메꾸기 위한 일종의 대안적 의식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옷들은 에이코라는 인물이 느끼는 고독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와도 같다. 물론 결혼 전에도 그녀는 월급의 대부분을 옷에 써버린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된 후 점점 더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치닫는 에이코의 쇼핑 중독을 보고 토니는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혼과 함께 고독에서 벗어난 그와 달리, 아내는 이를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극심한 상태가 되었다. 쌓여가는 명품 옷들 속에서 에이코는 점점 함몰되어 갔다. 그녀는 온몸을 동원하여 고독을 표현했다. 그러한 인간 앞에서 토니 타키타니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혼 생활을 이어오는 동안 어느새 그는 그런 적대적인 고독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져 버렸다. 토니는 그녀의 빈 공간을 채워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옷장 가득 채워지는 코트와 드레스와 구두를 향한 조용한 증오를 누적해나갔을 것이다. 아내의 옷 한벌 한벌은 그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행복의 균열을 감지하고 불안에 떨던 토니는 결국 이를 아내에게 털어놓는다. 과연 이렇게 많은 옷들이 필요할까. 조심스럽게 꺼낸 그의 말은 에이코의 존재론적인 구성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녀의 고독은 토니로부터 전면 부정당한 것이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고독은 그녀를 내부에서부터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실수를 촉발시켜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다.
사람은 죽는 바로 그 순간 증발하지 않고 얼마간은 그 영속성을 유지한다. 그건 생전에 지속했던 그의 사고와 행동을 기반으로 마치 침전물처럼 그가 사라진 자리에 고스란히 남는다. 살아있을 적 그가 부여한 애정의 정도에 따라 각 부산물들의 단단함이 결정된다. 이는 오래 남을수록 죽은 이의 삶과 더욱 강력하게 결부되어 그 의미를 바로 세우게 되는 것이다. 유산은 종종 하나가 아닌 다수의 존재이며, 끝까지 살아남아 망자와의 관계를 독차지하기 위해 서로와 경쟁한다. 토니 타키타니에게는 아내의 옷장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명품 옷들은 처음부터 그들의 결혼 생활을 가로 막았지만, 아내가 죽고 나자 이는 토니가 가진 그녀의 기억을 완전히 잠식해버린다. 차라리 연적이라면 잘못을 따지기라도 할텐데, 이 옷들을 대상으로는 그럴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토니는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지 못해 다소간 혼란스러워한다. <토니 타키타니>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히사코는 그런 우유부단함의 최초이자 유일한 목격자가 된다. 토니의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온 그녀는 그의 아내와 같은 사이즈 7, 신장 161 센티미터 전후, 신발 사이즈 22의 여자다. 일의 조건은 에이코의 옷들을 제복처럼 입을 것. 토니는 아내의 죽음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히사코는 그 이상한 제안을 승낙하지만 얼마 안가 이를 철회하겠다는 토니의 통보를 받게 된다. 아내의 패턴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그의 발상은 거기서 중단된다. 그는 에이코보다 오래 살아남은 그녀의 옷들을 업자를 불러 처분한다. 그리고 연달아 아버지 역시 보내고, 그의 재즈 레코드도 태워버린다. 그리고 토니 타키타니는 고독의 결정체처럼 우두커니 홀로 남는다. 그의 아내 그리고 아버지가 영속한다면 그건 그가 영화 끝에 독점한 고독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토니 타키타니>는 우리가 찾았다가 다시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상실의 순간 우리는 일시적으로 당황한다. 그러나 이내 잃어버렸다는 감각도 잃어버리게 되고 우리는, 토니 타키타니는, 그저 토니 타키타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