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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현 May 07. 2023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단평 | 순수한 사랑은 생각보다도 더 많은 함의들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이를 지킨다는건 그것이 수반하는 의미들도 전부 품겠다는 선언이다. 외부 시선은 힘을 합쳐 대항할 수 있으나, 사회정치적 선입견이 관계의 내부로 침투할 때 연인은 비로소 망연자실해진다. 그러나 어쩌랴, 그 역시 함께 극복하는 수 밖에 없다. 1970년대 독일 사회 한복판에 투척한 폭탄과도 같은 영화. | 극장전 | 074 | 서울아트시네마 |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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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 순수한 사랑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걸 정확히 규정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저마다 생각하는 바는 있다. 그리고 이를 한군데로 모으면 대체로 일정한 평균으로 수렴한다.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은 일단 나이차가 너무 나지 않아야 한다. 생김새도 적당히 어울려야 하며 교육 수준 역시 비슷해야 한다. 여기에 가정 환경, 경제력, 출신 성분 등을 같이 고려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정치 성향이나 믿는 종교가 특히 중요하다. 취미 생활도 같으면 좋다. 물론 이들은 한번에 맞추기가 쉽지 않지만, 어떤 것들은 딱 봐도 알 수 있다. 예컨대 피부색이나 국적 또는 사회적 계급 따위의 구분들 말이다. 만약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평균에서 벗어난다면 주변으로부터 의심을 받기 십상이다. 두 사람 간의 차이가 그렇게 큰데, 어떻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건 분명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다. 유산 상속을 노렸든 정략결혼이었든 간에 절대 순수한 사랑일 리가 없다. 어느 순간부터 순수한 사랑은 매우 복잡한 조건들을 수반하게 되었다. 이를 헤아리다보면 우리가 은연 중에 사랑에 다양한 사회적 책무들을 부과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랑이 발생하고 있는 공동체나 민족, 그리고 시대에 대한 코멘터리가 된다. 어느 누구도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 사랑의 당사자들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대표작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다. 이는 단순하게 보면 두 사람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이 둘은 우연한 만남을 갖고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이후 역경을 함께 헤쳐나간다. 이 관점에서 보면,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충실히 이행하는 영화다. 그러나 한 사람은 중년의 독일 미망인 여성이고, 한 사람은 아랍 출신의 젊은 외국인 노동자이다. 여기서부터 단순하지가 않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들의 사랑을 1970년대 독일 사회라는 맥락 속으로 대입시킨다.


우선 그 시대의 독일은 어떠한 곳인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국가를 재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부와 기업들은 자국민들이 기대하는 높은 수준의 임금을 지불할 여력이 안되었으므로, 자연히 국가 밖에서 값싼 노동력을 찾기 시작했다. 이는 독일 시민들이 멸시해 마다않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지역의 무슬림들이 이 시기에 독일로 넘어오게 되었다. 전쟁 복구가 완료된 후에도 이들의 존재는 독일의 노동시장에 큰 비중을 차지했고, 독일 시민들은 이들에 밀려 오히려 실직율이 올라가는 등 불균형을 초래한다. 더군다나 외국인 노동자들은 독일 사회에 동화되는 대신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했다. 이들은 같은 국가 출신끼리 어울렸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주류 독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지켰다. 이는 게르만 민족이라는 순수 혈통을 자랑하던 독일 시민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상황이었다. 들끓는 증오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하게 되었다. 68 운동으로 대변되는 좌파적 흐름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었지만, 독일 사회의 기저에는 반대로 우경화의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포착되었다. 제노포비아와 인종차별, 백인우월주의가 만연했고, 이들을 한군데로 묶는 사상적 시도들까지 나오게 되었다. 지금은 네오 나치로 불리우는 정치 세력은 당시 독일의 국가적 혐오 정서 위에 올라타 은밀하게 몸집을 키워나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까지 터지게 되자 사회적 불안은 극에 달하게 된다.


히틀러 알지? 에미는 알리에게 묻는다. 그들의 첫번째 만남에서다. 에미는 자신의 남편이 왜 그녀 곁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참이었다. 50대로 추정되는 중년의 여성인 에미는 과거 남편과 함께 나치당원이었다. 물론 그녀가 젊었을 당시에는 그것이 정상이었다. 에미의 타고난 정치 성향이야 어쨌든, 그녀는 그저 시대의 분위기에 맞춰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므로 에미의 해맑은 어투가 주는 위화감은 그녀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이걸 알리도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럼 당연히 알죠. 그녀가 한때 히틀러를 지지했고, 과격한 인구 말살 정책을 펼쳤던 정당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그건 말하자면 그녀가 커피를 맛있게 끓일 수 있다는 사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는 모두 개인을 구성하는 한 요소들일 뿐, 이를 전체적으로 규정짓지는 못한다. 알리는 선입견 없이 에미를 바라본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알리의 출신 성분이나 문화적 배경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알리가 열악한 노동자 숙소에서의 생활을 들려주자, 그녀는 순수한 공감의 차원에서 그를 위로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낼 것을 제안한다. 그들이 보내게 되는 첫날밤은 묘한 탈정치적 긴장감 속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거침없는 그들의 사랑은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받는다. 에미가 알리와 결혼하자 자식들은 연을 끊겠다고 선언하며 직장 동료들은 그녀를 따돌리고, 이웃들은 알리를 차별 대우한다. 파스빈더는 어딘지 모를 연극적인 연출 방식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수면 위로 띄운다. 그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혐오의 순간들을 거울처럼 비춰보이면서 영화를 현실 속에 대입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주변 인물들이 에미와 알리를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알리의 말처럼 독일인은 주인, 그리고 아랍인은 개라고 정의내리는 시대의 풍토 속에서 이 둘의 부정교합을 반대하는 것에 더 가깝다. 에미와 알리는 이들의 눈에는 절대 결부되어서는 안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다. 두 집단이 사회문화적 갈등을 겪고 있는 와중에, 이 둘만 마음 편히 휴전을 선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에미와 알리의 애정전선은 어느새 1970년대 독일 사회의 정치적 대리전의 현장으로 바뀐다. 주변 인물들은 각 집단을 대표하는 상징적 주체로 이 둘을 옹립시킨 후,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이들의 결합을 거부한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에미와 알리를 가족과 직장 그리고 이웃 공동체에서 소외시키는 수법을 동원한다. 이렇게 하면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 기대한 셈이다. 그러나 이를 에미와 알리가 보란듯이 극복해내자, 이들을 다시 공동체 속으로 품는 교묘한 방식으로 이간질을 이어간다. 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던 아들은 에미에게 용서를 빌고, 단골 손님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 가게 주인은 과도한 친절을 베풀면서 그녀를 모객한다. 직장에서는 그녀의 동료들이 다시 에미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이 저마다의 이득을 챙긴 것은 덤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효과로 에미는 독일인으로써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한동안 소속 집단을 겉돌았던 그녀의 서러움이 풀리면서, 에미는 기쁜 마음으로 무리의 방식에 동화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녀의 입장이 다시 정치적으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북아프리카 고향의 음식인 쿠스쿠스를 찾는 알리를 타박하면서, 은연 중에 자신의 바뀐 입장을 드러낸다. 알리도 독일 음식을 좀 먹어버릇 해야지.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사소해 보이는 것들로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이 두 사람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감정의 골이 깊은 민족 간의 갈등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에미가 알리를 사랑할지 몰라도, 독일인으로써 아랍인들에 대한 못마땅한 점들이 많을 수 있다. 그녀가 알리에게 이런 생각들을 은근히 내비칠 때마다, 그 역시 이를 민족 단위로 확대 해석하고 불쾌해 한다. 어느 순간부터 이 두 사람은 같은 지붕 아래에서 국가 대표성을 띈 채 생활한다. 선입견 없이 서로를 대했던 그들의 순수한 사랑 속으로 깊은 불안이 잠식해 들어온다. 사방을 둘러싼 아파트 벽이 점점 좁혀들어오는 것만 같다. 알리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바깥을 나돌면서 방황한다.


파스빈더는 자신이 폭탄을 만드는 대신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그 정의에 정확히 부합하는 영화다. 차별과 편견이 팽배했던 1970년대 독일 사회 한복판에 그가 투척한 이 영화는 그 폭발 반경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들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대놓고 주인공 커플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주변 인물들은 물론이고, 무리의 논리를 끌어들여 내재화된 혐오를 상대방에게 얼핏 내비치는 에미와 알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 두 사람은 일시적으로 세상에 맞서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방어했다. 영화 중반부, 카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알리에게 저들은 우리를 질투하는 것일 뿐이라고 답변하는 에미는, 그들의 사랑을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대치시켜 그 순수성을 사수해낸다. 그러나 이후, 그 차별과 편견이 이 둘의 관계 속으로 은밀히 침투하게 되자, 이들의 사랑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개인 대 개인으로 맺어졌던 사랑은 어느새 가족 - 공동체 - 그리고 국가의 차원까지 확장되어 시대정치적 담론의 각축장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중심부에서 냉정한 편가르기의 논리가 에미와 알리의 연대를 위협한다. 파스빈더의 폭탄은 이토록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도화선 역할을 한 순수한 사랑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온다. 에미와 알리의 사랑은 과연 순수한 것일까. 나이와 인종, 계급이 교차하는 그들의 관계는 순수한 사랑에 대해서 사회가 내린 일반적 정의에서 멀찌감치 벗어나게 되므로, 그 자체로 그에 대항하는 정치적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순간부터 이들의 사랑은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시끄럽고 외설적이며 서글픈 무엇이 된다. 이건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큰 형벌이 아닌가. 그래서 이 둘은 다시 뭉친다. 알리는 그를 다시 찾아온 에미에게 첫만남 때 그랬던 것처럼 춤을 신청한다. 그가 바 주인과 가졌던 외도에 대해서 고백하자, 에미는 조용히 그를 용서한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춤을 춘다. 서로 손을 꼭 마주잡은 그들의 사이는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이 완전하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이들의 작지만 강한 연대로 세상을 향해 충격파를 던지는 문제작이다. | 극장전 | 074 | 서울아트시네마 |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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