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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현 Jun 28. 2023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단평 |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커보인다. 그러므로 실수로 단짝 친구의 공책을 가져온 사소한 일도 아이의 입장에서는 중대사다. 누가 뭐라던,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되는 그의 모험은 어딘지 낯이 익다. 그 시절을 지나쳐버렸다고 한들, 우리가 마음 속에 새겼던 초심마저 잊혀질까. 구불구불한 길을 열심히 달려 올라가는 소년을 응원할 때, 우리는 모두 어렸을 적의 자신을 응원하는 기분을 갖게 된다. | 극장전 | 084 | 서울아트시네마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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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 삶의 미로에서 길을 찾다보면 자연스럽게 요령이란 것을 터득한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효율과 이해타산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눈 앞의 여정은 많은 경우 너무도 멀고 험난하다. 때문에 목적지에 이르는 최단 거리와 그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을 앞서 계산한다. 그런 다음, 지름길을 택하거나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를 최대한 단축시킨다. 그러면 보다 편하게 목표한 지점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이란에 사는 한 소년의 모험을 통해 이를 떠올리게 해준다. 내용은 단순하다. 단짝 친구의 공책을 잘못 가져온 아메드가 이를 되돌려주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 떠나는 짧은 이야기다. 그러나 아메드의 여정 자체는 쉽지 않다. 그가 요령을 전혀 모르는 어린 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눈 앞에 놓인 길을 갈 뿐이다. 지그재그 언덕을 오를 때, 그는 최단거리로 가로지를 수 있음에도 구태여 굽이치는 길의 모든 모퉁이를 거쳐 올라간다. 그리고 이런 주인공 만큼이나 영화도 우직하게 이를 카메라에 담는다. 경제성은 이곳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주어진 길을 그대로 간다는 것. 그건 삶에서 어떤 요행을 바라지 않는 정직함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우리의 마음 속에서 희미해지는 이 가치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조용히 소환시켜낸다.


먼저 어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들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아이들의 복종과 과제 이행을 주문한다. 담임 선생님은 공책에다 숙제를 하라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네마자데를 다그치고, 어머니는 아메드의 간곡한 호소는 무시하고 집안일만 시킨다. 이후 등장하는 어른들도 대부분 아이들에게 권위적인 태도를 보인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의 어른들은 왠지 아웃포커싱된 듯한 기분을 주는데, 그들이 인물로써 아이들과 동일선상에 있기보다는 프레임의 외부로부터 도착한 전언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이들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기 위한 존재나 다름없다. 아이들은 이에 순종하지만, 심리적 거리를 느낀다. 긴 시간 이어지는 설교를 담은 롱테이크 구성이나, 그 순간 아이들의 얼굴에 클로즈업하는 방식은 관객들마저 주눅 들게한다.


사실 어른들의 요구사항들은 제법 합리적인 구석이 있다. 예컨대 담임 선생님은 네마자데의 실수를 이미 세번이나 눈 감아준 상태다. 다음번에도 잘못하면 퇴학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도 아마 제자에게 겁을 주기 위함이지, 진심은 아닐 터다. 공책에다 숙제를 해야 체계적으로 내용을 익힐 수 있다는 그의 논리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강조한 공책의 중요성은 뒤이어 등장한 어른인 어머니에 의해서 격하된다. 그녀의 우선순위는 밀린 집안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이외에는 아메드가 잠자코 자기 숙제나 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권위의 상반된 주문들 사이에서 혼선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어른들은 모두 저마다의 시각에서만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개별적으로는 별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 둘씩 모이면 그 총체는 어느새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다. 이는 어른들의 요구사항 중 일부를 누락하거나 불충분하게 이행하는 결과를 낳고, 결국 꾸중을 듣게 된다. 초반부의 교실 장면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허리가 아파 책상에 제대로 못 앉는 아이는 매일 아버지를 도와 무거운 우유통을 운반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수업시간에 지각한 아이는 포쉬테에서 왔다고 하는데, 관객들에게도 그 거리를 체감시켜 변명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공책이 때로 얼룩진 아이는 밭일을 하며 숙제를 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어른들의 상충되는 지시를 받으며 학업과 가사 노동을 병행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 영화 속 아이들이 처한 현실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딱히 아이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중간에 등장하는 아메드의 할아버지가 대표적이다. 그는 담배갑이 옆에 있음에도 굳이 아메드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다. 어른들의 말을 들어야지. 그는 납득 가능한 이유가 아닌 그저 권위로 누르는 방식으로 그의 손자를 대한다. 이러한 태도는 보수적인 이란, 특히 북부 지방의 시골 마을 코케르에서는 더욱 강조되는데,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화면 구성으로 인물을 잡아 증언의 리얼리티를 높인다. 할아버지의 주장은, 어른들에게 복종하고 시킨 일은 바로 해야지 아이가 제대로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순환논리처럼 보이지만, 원칙적으로는 이 말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직전 아메드의 고생을 지켜본 관객들은 상반된 시각으로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어른들이 강요하는 이념과 행동규범이 얼마나 현실과 동 떨어져 있는지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수용 한도를 넘어가는 요구사항들을 맞추려면 결국 요령이 필요하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어른들은 이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에 의해서 아이들이 알아서 터득하도록 한다. 단짝 친구의 공책을 잘못 가져왔다는 걸 알게 된 아메드는 집요하게 이를 설명하여 어머니를 이해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실수는 친구가 한 것이니 퇴학 당해도 싸다는 반응을 보인다. 사정은 알겠으나,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으니 포기하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녀의 아들에게 이기주의를 은연 중에 강요한다. 생각해보면, 아메드는 공책을 돌려주는 것 외에 숙제도 해야하고 빵도 사와야하며 아기에게 젖병도 물려줘야 한다. 모두 어른들이 시키는 일들로, 친구를 위한 일보다 높은 우선순위를 점한다. 만약 아메드가 공책을 돌려주려고 포쉬테까지 갔다 오면, 다른 일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어머니는 그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에 더 가깝다. 심지어 아들을 비호하기 위해 은근히 네마자드 쪽으로 잘못을 돌리기까지 한다. 단순해보이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어른들의 비정한 논리가 드러난다. 자신에게 뭐가 더 유리한지를 고민하라고 하며, 아이들이 요령을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경우에는 타인을 위한 책임이 도마 위에 오른다. 각박한 생활 속에서 특히 더 평가절하되는 가치이다. 강요와 회유를 거치게 된 아이들은 보통 어른들의 의견을 따라 이를 포기한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성장하면서 모두가 겪는 과정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강력한 영화적 동기는 이 불가항력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다. 아메드는 고민 끝에 친구의 공책을 돌려줄 것을 결심한다. 어머니로부터 빵을 사오라는 지시를 받은 직후다. 그러므로 그의 계획은 포쉬테에 있는 친구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빵도 사오는 것이다. 즉, 아메드는 어른들과 직접 대립하지도 않지만 반대로 이들의 권위에 의존하여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가장 때묻지 않은 상태의 소명의식으로 나름의 선택을 내린 셈이다. 공책을 돌려주는 것과 빵을 사오는 것. 둘 중의 하나를 포기했으면 임무를 완수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령을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한다. 온종일 포쉬테를 헤맸으나 결국 허탕만 쳤고, 빵가게도 문을 닫아 이마저 실패했다. 어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평가하자면, 그의 하루는 빵점짜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화 내내 그와 여정을 함께 한 입장에서는 이를 긍정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가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가 뭐라던,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행동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버지에게 혼나고도 밤을 꼬박 세워 친구의 숙제를 대신 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또 다른 요령이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면, 굳이 포쉬테에 가서 하루를 낭비하고 꾸중을 듣는 일도 피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지켜가며 고생을 견뎌낸 끝에 터득한 요령이기에 더 값지다. 소년은 순수한 초심을 그대로 간직한 채 조금은 더 현명해진다. 영화의 엔딩 장면, 담임 선생님은 아메드가 네마자드의 숙제까지 해줬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간다.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책갈피 속 들꽃 한송이가 그를 반긴다. 삶에서 작은 승리를 거둔 아이에게는 그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우리 자신을 향하는 위로이자, 격려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구불구불한 길을 열심히 달려 올라가는 그의 모험을 응원한다. 그것이 모두가 마음 속에 간직한 초심을 다시 불러일으켜, 가슴을 뛰게 만들기 때문이다. | 극장전 | 084 | 서울아트시네마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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