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극장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현 Oct 01. 2023

이다

단평 | 이다가 걷고있는 신앙의 삶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한없이 순결하게만 보였던 그 길은 침묵의 역사를 지면 아래에 품고 있었고, 이를 확인한 완다는 속세의 인간답게 반응한다. 지금까지의 금욕적 생활이 스스로 알지도 못했던 울분을 삭히는 과정이었다는걸 깨닫는 순간, 이다 역시 속세의 인간이 된다. 마침내 희생을 맹세할 수 있는 진정한 조건이 완성되자, 영화의 프레임은 마구 요동치기 시작한다. | 극장전 | 118 | 한국영상자료원 | 9/24  


+


비평 | 신앙의 삶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신성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성직자들은 그에 못지 않게 저마다의 세속적인 사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헌신하게 되는 신앙의 삶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내적 평화를 이루기 위한 여정과 결부된다. <이다>는 폴란드 감독인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장편 영화로, 수녀인 안나가 자신의 원래 이름이었던 이다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녀는 고아의 신분으로 수녀원에 맡겨져 지금까지 성직자로써의 길을 밟아왔다. 그러나 서원식을 앞둔 그녀는 원장의 권고에 따라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만나러 잠시 수녀원을 나온다. 이모는 완다라는 인물로, 겉보기에는 술과 섹스에 중독되어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한심한 인간이다. 완다는 그녀의 조카를 보자, 이다라는 이름과 함께 그녀의 태생이 유대인이었음을 알려준다.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평생을 살아온 이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금새 다잡고, 완다와 함께 부모의 유골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하는 <이다>는 폴란드 시골 풍광 속의 두 인물을 여백과 함께 담는다.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헤드룸의 존재가 무색하게 이다와 완다는 완전히 지면에 붙어 발걸음을 재촉한다. 두 사람이 밟고 있는 그 땅은 침묵의 역사를 품고 있다. 1939년 폴란드는 거의 동시에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아 분할 점령된다. 시민들은 이 두 세력에 저항했으나, 이는 곧 무자비한 탄압을 받는다. 공산주의자들이 폴란드 민족 학살을 자행하는 한편, 바르샤바 서쪽은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중심지가 된다. 나치 독일 점령기의 폴란드 내에서는 이러한 유대인 학살인 포그롬에 적극 가담한 시민들이 많았다. 주로 기독교 신자나 민족주의적 성향의 우익 세력에서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단지 유대인을 밀고하는 것을 넘어 직접적으로 린치를 가하고 살해하기에 이른다. 전쟁 말기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다의 부모 역시 이런 역사적 광풍의 피해자다. 그리하여 완다는 부모의 유골을 찾아 나서는 이다에게 경고한다. 만약 그곳에 갔는데 신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할래?


영화 속의 두 인물은 극명히 대비된다. 이다에 대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건 그녀 역시 몰랐던 사실들이다. 그리고 이는 초반에 주어지는 이다라는 이름이나 유대인 태생 정도가 전부다. 수녀원에서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던 그녀는 신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경험보다는 그것의 부재가 현재의 그녀를 만들었으므로, 이다는 세상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말하자면 이다의 삶에는 거대한 괄호가 쳐져있다. 그 텅 빈 공간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그녀는 이를 채우기 위한 여정에 나서는 것이다. 완다는 이모의 의무감으로 이에 동참하지만, 특유의 신랄한 언행으로 계속해서 조카의 무지를 조롱한다. 전쟁이 끝나고 지방 판사로 활동한 그녀는 공산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반대파들을 숙청한 이력이 있다. 부정선거로 수립된 폴란드의 전후 공산당 정권은 반공 성향의 인사들을 탄압했다. 이들 중에는 나치 독일에 맞서 격렬히 저항했던 민족투사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피의 완다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그녀는 과거에 인민의 적들을 기소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극 중 시점인 1960년의 완다는 되돌릴 수 없는 윤리적 부채를 안고 살아간다. 이러한 정보들은 산발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완다는 분명 이 모든 것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와 함께 길을 떠난다. 그녀는 인생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그런 인간조차도 신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결국 알고 모르고의 여부가 만들어내는 차이는 크다. 폴란드의 역사를 몸으로 겪은 완다지만, 이를 똑바로 응시하겠다는 의지는 이다로부터 나온다. 여정의 끝에서 그들은 이다의 부모와 그들에게 맡겼던 완다의 아들이 이웃인 펠릭스 가족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독교 신자이자 농부인 펠릭스는 한때 이다 가족이 살았던 농경지에서 터를 잡고 생활하고 있다. 유대인 학살에 침묵하는 대다수의 폴란드 국민들처럼 펠릭스 역시 그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간 인간이다. 그러나 완다의 협박에 못이긴 그는 과거 범행을 고백하고, 그녀의 가족을 죽이는 과정에서 이다만은 살려내 수녀원에 맡긴 장본인이라는 것을 밝힌다. 아들과 여동생 부부의 최후를 알게된 완다는 아마도 감당할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섰을 것이다. 공백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그것이 발생하게 된 기원은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 극 중 사건들을 통해 완다는 자기가 안고 있는 공백의 속성을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그것은 위협적인 무장을 한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게된 완다는 끝내 속세의 인간으로써 반응한다.


이다는 어떠한가. 종교적 소속이 생사를 갈라놓아 그녀의 인생을 결정했다. 침묵의 역사를 겪은 수많은 폴란드인들처럼, 그녀 역시 선택의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본인이 주도권을 가져야 마땅한 인생에서 이다는 갓난아이일 때 이미 이를 신에게 양도한 것이다. 이건 그 자리에서 펠릭스에 의해 살해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운명에 자신을 맡길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다는 평생을 헌신했던 금욕적 생활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울분을 삭히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인식하게 된 이상 그녀 역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완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녀 역시 속세의 인간이 되고 만다. 진실의 과일을 먹고 지면에 불시착하게 된 천사는 이제부터 중력을 감당해야 한다.


신앙의 삶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이는 전혀 숭고하지 않다. 완다는 이 점을 간파했다. 지금까지 많은 것들을 잃어오며 살아온 그녀는, 반대로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 그러므로 서원식을 앞둔 조카의 행보가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이다는 본 경로에서 벗어날 이유도 없지만, 이것을 유지해야할 이유도 없다.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희생을 맹세할 수 있지. 완다는 조카에게 묻는다. 판돈없는 게임을 하는 비겁함이 이다가 걸어온 신앙의 삶을 규정짓는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갖고 있던 공백의 속성이다. 그러나 애초에 자신에게 없었던게 아니라 기꺼이 포기하기로 결심한 무엇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다는 이에 따라 속세의 인간처럼 하룻밤을 보낸다. 술과 담배를 하고,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 남자와 몸을 섞는다. 그리고 다음날, 남자가 그녀에게 전혀 다른 인생의 가능성을 속삭이자, 비로소 희생을 맹세할 수 있는 조건이 완성된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수녀원으로 향하는 이다의 모습은 확신에 차있다. 마침내 요동치기 시작한 영화의 프레임이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이 삶의 주도권을 쥐는 순간, 그의 주변은 늘 격렬히 흔들리기 마련이다. | 극장전 | 118 | 한국영상자료원 | 9/24

매거진의 이전글 어둠 속의 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