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극장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현 Mar 14. 2023

방랑기


여성의 삶에서 성공이란 두갈래길이다. 첫번째는 딸이나 아내, 그리고 어머니로써의 성공이다. 여성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된 이 역할들을 대체로 충실하게 수행해낸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두번째 성공을 포기한다. 그것은 개인으로써의 성공이다. 여성들이 스스로 돈을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그 전까지 이들은 결혼을 통해서 아내가 된 후, 남편을 대리인 삼아 간접적으로 성공을 이루곤 했다. 남성들의 업적은 스스로의 것이 되지만, 여성들은 반대로 남편에 의존하여 업적을 만들어나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본인의 존재를 입증하려면 남편을 얼마나 빛낼 수 있는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이것을 내조라고 부른다. 우리는 내조를 훌륭히 수행해낸 여성들을 바람직하게 바라본다. 그것은 정확히 그들의 범위 내에서 이뤄낸 최선의 성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이 길을 탈선하여 자신만의 성공을 이루고자 하는 여성들을 경계한다. 그녀들이 두번째 성공을 향해 정해진 영역 이상을 바라게 되는 순간, 그것을 첫번째 성공에 대한 직무유기이자 방종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은 결코 곱지 않다.


그러나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는 이렇게 뻔한 문제 의식으로 풀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가 탁월한 이유는 여성의 개인적 성공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야시 후미코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단지 그녀가 한 순간 내린 양자택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후미코는 끊임없이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본인의 인생을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들도 종종 접한다. 관객들은 그녀가 내린 선택들의 증인이 되고, 이들 중 몇 개 - 사실상 대다수 - 는 잘못된 결정이었다는걸 알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그녀의 남성 편력이다. 후미코는 잘 생기고 그녀의 글을 좋아해주는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로 인해 그녀의 인생은 더 불행해진다. 첫번째 남편이야 잘못 볼 수 있으며, 그녀가 운이 나빴다고 간주해도 된다. 그러나 두번째 남편에 이르게 되면, 관객들은 반대로 후미코에게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것이라고 평가 내린다. 전자의 경우 그녀는 그저 불운한 여성일 뿐이나 후자의 경우 똑같은 면죄부를 주기가 어렵다. 우리는 두번째 실수에는 자비가 없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나 시대적 배경을 향해 어설프게 형성되던 비판 의식은 어느새 후미코 본인에게 향한다. 이런 식으로 <방랑기>는 피해 서사로 읽을 수 있는 구간들을 전부 들어내고, 모든 것이 후미코의 자업자득으로 귀결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건 선택이 아니라 방향성의 문제다. 후미코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구조로 인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걸 적극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영화 흐름 상, 우리는 그녀의 두 남편들을 자연스럽게 야스오카와 비교한다. 그의 순애보는 극 중 내내 일관되게 유지되고, 보상없이 그녀를 도와주며, 나중에는 인쇄 공장의 사장까지 되어 능력도 증명한다. 그녀의 두 남편들이 나쁜 남자들이라면, 야스오카는 좋은 남자다. 그러므로 관객들 입장에서 후미코가 결국 야스오카와 맺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상술한 기준 - 잘 생기고 그녀의 글을 좋아해주는 남자 - 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야스오카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패턴이라면 구혼자가 속물이기 때문에 여자로부터 거절 당하는데 여기서는 반대다. 야스오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증거들이 넘치는데도 어째서 후미코는 하찮아 보이는 이유들로 그를 마다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후미코가 타협없는 여자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야스오카는 분명 좋은 남자지만 그를 신랑감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후미코가 행복하길 바란 나머지, 그녀가 스스로 세운 기준을 적당히 양보해서 그와 결혼하기를 희망한다. 즉, 그녀의 주체성을 행복 아래에 두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성의 주체성을 충분히 존중한다고 생각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바로 이를 주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이건 그다지 나쁜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사회적 관성이며, 1920년대라는 근현대의 맥락 하에서 한층 더 강화되는 부분이다. 실제로 후미코의 주변에는 가난에 못이겨 원치 않는 결혼을 하는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녀의 글쓰기 재주를 동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후배는 결국 돈 많은 남자의 첩으로 들어가면서 소식이 끊긴다. 결혼을 하는 순간 여성들은 남편과의 관계에 귀속되므로 그들의 서사는 중단된다. 후미코 역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면 그녀의 불행은 야스오카에 의해 단절되고 <방랑기>는 거기서 끝나는 이야기가 된다. 그걸 잘 알기 때문에 그녀는 계속해서 빗나간다. 영화 속에서 후미코는 단 한순간도 주체성을 놓아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기준을 기어이 사수해내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행도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불행은 주도권을 지키는 수단이다.


죽느냐 사느냐, 여하튼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하야시 후미코는 그녀의 소설에 이렇게 쓴다. 이건 다르게 표현하자면 죽고 사는 문제로 자신의 방향성을 수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제국주의와 대공황의 시대. 아무것도 없는 가난하고 젊은 여자에게는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는 일조차 힘든 시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미코는 쉬운 길을 거부하고 집요하게 자신의 선택들을 긍정한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온 몸으로 완성한 그녀의 모습 - 조소가 가득한 표정과 일말의 성의도 없는 자세, 전혀 여성스럽지 않은 행동거지들 - 또한 후미코가 규격 외 여성이며, 얄팍한 시대 정신의 희생자가 아님을 시사한다. 그녀가 겪는 고난과 역경은 온갖 저항에도 불구하고 후미코가 기꺼이 견뎌내기로 결단내린 삶이므로, 그녀는 훈장처럼 이를 자랑스러워한다. <방랑기>는 그녀의 불행예찬이다.


문학은 그런 그녀의 삶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나루세 미키오는 매 챕터의 분기점마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그녀의 산문들로 가득 채운다. 생각나는 대로 거칠게 써내려간 히라가나들은 하야시 후미코가 찾아낸 인생의 진리, 그 정수를 품고 들어온다. 텍스트가 스크린을 만나는 가장 이상적인 포맷 아래, 후미코는 조용하고 차분히 통제권을 행사한다. 그녀는 후배에게 문학에 대한 자신의 동기를 이렇게 고백한다. 내 인생이 이게 다가 아니란걸 보여주기 위해 나는 글을 쓰는거야. 만약 불행이 그녀의 주체성을 뒷받침하는 판결이라면, 문학이란 이를 입증하는 알리바이다. 그러므로 후미코는 계속해서 불안정한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그것을 자신의 문학 속으로 편입시킨다. 술집 여성으로써의 가난하고 부끄러운 삶이나 실패한 결혼 생활, 남편의 학대까지도 그녀에게는 문학적 재료에 불과하다. 그녀는 그녀의 인생, 그리고 이를 소재로 다룬 그녀의 글에 자신만만하다.


스스로에 대한 긍지를 일으켜세운 사람은 성공의 예감도 정확하다. 1930년대에 출간된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소설을 1960년대 영화로 옮겨온 <방랑기>이지만 에필로그만은 책에 없는 내용이다. 때문에 이는 소설의 울타리를 벗어난 메타픽션 (Metafiction)인 동시에 나루세 미키오 본인의 첨언이 들어간 후일담으로 읽힌다. 냉정한 렌즈 아래 그가 펼쳐보이는 후미코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낭만주의나 교훈을 배제한 채 성공의 비정한 조건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쿄코의 원고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과거의 연적이자 현 문단 동료인 쿄코는 후미코를 찾아와 그녀의 원고를 건내주며 문학지 <여성예술>에 대신 제출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후 후미코는 남편인 노무라와의 부부싸움을 겪고 이혼을 단행한다. 그녀는 그러한 혼란 속에서 쿄코의 원고 제출을 그만 깜빡한다. 그러나 <방랑기>가 같은 문학지에서 채택되면서 후미코가 입상하게 되자 쿄코는 경쟁자 제거의 차원에서 그녀의 원고를 고의로 누락시킨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서브 플롯임에도 불구하고 본 사건은 후미코라는 여성의 본질에 대한 주위를 환기시킨다. 그녀는 신데렐라가 아니다. 삶에서 그녀가 앞서 나가는 구간이 있다면 이는 모두 그녀의 치밀한 계획 하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녀는 반칙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한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생존력을 구사한다. 그리고 <방랑기>는 그녀의 삶에 대한 전기적 성격을 가진 증거물로써 채택된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이 영화 자체가 하야시 후미코라는 여성이 끝내 이뤄낸 눈부신 성과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복잡하고 규정내리기 어려운 무엇이 되고 만다. 페미니즘의 정의는 여성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라 하지만 이는 많은 오해를 발생시킨다. <방랑기>에서의 후미코는 그러한 몇몇 현대적 함정들조차도 낭랑하게 피해서 간다. 예컨대 그녀는 여자에게 남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 않으며, 기준에만 맞는다면 결혼 그리고 그 이후 남편 중심의 생활에도 큰 거부감이 없다. 그녀의 주체성은 그러한 것들 따위로 흔들리지 않는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이건 결혼을 여성의 성공의 대척점에 놓는 일부 페미니즘 텍스트들보다 더 진보적인 관점이다. 그러므로 후미코가 하고 있는 작업은 혼란한 시대 속 여성의 존재의의를 보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예술로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담아내기란 어려우나, <방랑기>는 하야시 후미코가 서술한 자전적 증언과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적 해석 그리고 타카미네 히데코의 생동감 넘치는 육체라는 삼박자를 통해 전방위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상을 완성한다. 여성, 가난, 야망. <방랑기>는 이들에 대한 대담하고 진취적인 재정의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오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