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내가, 총을 든 백인이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무리 앞에 서 있다. 겉으로는 주연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뒤쪽의 저 노란 얼굴들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떠밀리는 어리석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 그리고 내 모든 삶은, 동양에 있는 모든 백인의 삶은 비웃음을 당하지 않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었다.”
조지 오웰, <코끼리를 쏘다>
디에고 데 자마는 끈이 떨어진 자다. 18세기 말 파라과이로 추정되는 지역의 한 벽지에서 치안 판사 노릇을 하고 있는 그는 막막한 심정으로 태평양 너머 본국을 바라본다. 아마도 원치 않는 파견으로 인해 오게 된 이 변두리에서 벗어날 날만을 기다리지만, 그의 바람은 요원해보인다. 몇 년째 자마는 전근을 요청하고 있지만 스페인 국왕으로부터의 서신은 오지 않는다. 고립된 상태에서 그는 가족과의 연락도 끊겼고, 상사에게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부하 직원들은 물론 지역 원주민들에게도 무시당한다. 자마는 이 마을에서의 생활이 그저 일시적인 것이라 여겼을 터이다. 그가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스페인, 내지는 그의 가족이 거주하는 레르마이며, 이 이름도 모를 벽지는 그가 잠시 거쳐가야하는 경유지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이 운명은 그를 중심부로 연결시키는 모든 끈들을 끊어놓고 그가 저 멀리 외곽으로 밀려나는 모습을 바라본다. 운명은 그 끈을 절단하는 순간에 바로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마에게 그 감각은 아주 뒤늦게, 그리고 서서히 찾아온다. 따라서 그걸 알아차리는데 약 9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남아메리카에 대한 스페인의 영향력이 점점 축소되고 희미해지던 시절, 그와 같은 처지의 식민주의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주변부에 속하지만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있는 중이다. 그에 대한 근거로 자신들의 직위 - 예컨대 스페인 왕국의 치안 판사 - 에 매달리며 스스로를 중심부에 속한 인간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야만 식민지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야만인들과 더러운 각종 짐승들, 지역 풍습과 비이성,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들, 무성한 정글 따위와 선을 긋고 업신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느새 식민주의자들을 둘러싸 포위한 채 그들 내부로 천천히 침투한다. 오염되어 가는 그 느낌을 떨쳐버리려 그들이 발버둥쳐도 바뀌는 것은 없다. 그걸 알고 있는 운명과 외부 세력들은 기괴한 모양의 가면 뒤에 자신들의 조소를 감춘다.
이렇게 상상해보자. <자마>는 남아메리카의 관점에서 써내려간 수정역사관이다. 비유하자면 이는 황실의 엄격한 건축 양식이나 붉은 제복을 입은 장교들, 웅장한 갈리선 따위로 만든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스페인의 식민사관, 내지는 디에고 데 자마의 마음 속 이상향이다. <자마>는 이를 전면 부정하고 해체한 뒤 그 폐허 속에서 악한 풀뿌리들이 자라나는 광경을 관조하는 영화다. 여기에는 매음굴의 퀴퀴한 냄새나 뒤에서 엄습하는 라마, 우거진 나무 속에서 우글대는 풀벌레들만이 존재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서사를 유지하려는 자마의 노력에 계속해서 딴지를 걸거나 비웃는다.
이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이 영화가 의외로 명확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9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다소 두루뭉실하게 흘러가나, 비선형적인 순서를 따른다거나 중요한 사건들이 누락되는 등의 기교는 없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자마가 겪고 있는 무한 답보의 상태와 환경적인 맥락, 그리고 이를 통해 느껴지는 그의 심적인 고통을 큰 어려움 없이 전달한다. 그것은 그녀가 바라보는 식민지의 역학 관계와도 닮아있다. 정도야 다르겠지만 식민지란 어쨌든 정복자의 관점에서 운영되는 시스템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권력 관계가 전복되는 순간 식민지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원주민들은 그 절대적인 선을 넘지 않으면서 더 교묘한 방식으로 체제를 교란시키고 혼선을 야기한다. 이를테면 수동적 공격 (Passive Aggression)인 셈이다. 이는 식민주의자들이 종종 무시하는 주변부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들은 타격 받아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자마>에는 바로 이러한 게릴라적인 기습들이 산재되어 있다. 예컨대 자마가 재무장관의 부인인 루치아나를 찾아갈 때,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를 일단 중심부에 놓는다. 그러나 여기에 집중을 하려는 순간, 방의 구석에서 삐걱삐걱 대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대화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자마가 그 소음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리자 부채질을 하고 있는 하인의 경멸어린 시선과 마주친다. 어느새 자마와 루치아나가 나눈 대화의 내용은 기억이 안나고, 그 짜증나는 소음만이 머릿 속을 맴돈다. 사실 이에 대한 어떠한 제재를 가하거나 비난을 던지기도 어렵다. 식민주의자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중심부의 가치들, 예컨대 법이나 품격, 또는 위계 질서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부분이 없고, 단지 그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집중을 흩뜨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소한 것들은 마치 세균처럼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증식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식민주의자들의 존재론적인 구성까지 좀먹는다. 바로 이 전염과 부패의 감각이 <자마>가 역사적 맥락 위에 스스로의 존립가치를 세우는 방법론이다.
이런 접근은 영화 외적으로도 작용하는데,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즐겨쓰는 실험적 기법들은 특기할만하다. 첫번째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충돌시키는 방식이다. 자마를 향해 느닷없이 알기 어려운 예언을 쏟아내는 소년, 또는 총독이 말하는 와중에 마음의 소리가 이를 덮어버리는 그의 부하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눈 앞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이명 (耳鳴)들이다. 장 뤽 고다르를 필두로한 누벨바그의 기수들이 떠올려지는 대목이다. 두번째는 시선의 방해 요소를 도입하는 방식이다. 영화 초반부 자마와 그의 부하가 범죄자의 처벌 여부에 대해 논쟁을 벌일 때, 카메라는 이들을 안보고 영 딴청을 피우고 있다. 또는 자신의 전근을 총독에게 절박하게 호소하는 자마 대신 뒤에서 느릿느릿하게 다가오는 라마에게 초점을 맞추는 식이다. 이로 인해 전경과 후경의 피사체들은 서로 뒤섞여 우스꽝스러운 장면들이 연출된다. 세번째로 인물들의 명암을 흐리는 방식이다. 자마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중요도에 관계없이 극히 모호하게 처리되었기 때문에 놓치기 쉽다. 영화 내내 세번이나 배우가 바뀌는데도 동일한 사람처럼 보이는 총독이나, 원주민 아이들 틈에서 끝내 찾아내지 못한 그의 자식이 그렇다. 마지막으로는 음향효과로 추락의 감각을 주는 방식이다. 일명 셰퍼드 음이라는 것을 통해 귀에 착각을 일으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심어놓는 것이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과 거래를 진행할 때 이 노이즈가 울리며 자마의 내부로 깊숙이 침잠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자마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위치에 숨어서 그를 농락한다. 그로 인해 이 관료 나리는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불행 앞에서 그저 시름시름 앓는다. 인류가 질병을 여태껏 정복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너무도 다른 층위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므로 도무지 적을 식별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한 조건이라면 자마는 필패할 운명이다.
그러므로 명확한 적의 존재가 이 치안 판사에게는 중요하다. 작중 내내 소문만 무성한 도적인 비쿠냐 포르투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 후반부 자마는 도적 토벌대에 자원한다. 그에게 비쿠냐 포르투란 그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자 최후의 보루이다. 그의 정신을 사방으로 분산시키려는 외부 세력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악당에 대한 자마의 인식 만큼은 일관되다. 허깨비 같은 존재이지만 자마의 세계에서는 그나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비쿠냐가 정체를 드러냈을 때, 자마는 어딘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에게 비쿠냐는 주변부에서 나와 직접 서사 안으로 진입한 중심부의 인물인 셈이다. 그는 비쿠냐의 칼날이 그리는 궤적을 곁눈질하며 몸을 벌벌 떠는데, 그건 마침내 실질적인 위협을 접한 것에 대한 지극히 본능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자마의 기대와 달리 이 도적 일당은 실체가 없는 코코넛이란 보석에 집착하는 것을 알게되고 그는 실망한다. 9년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자마가 학습한 것이 있다면 이 무심한 지옥이 중심부의 인간들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다. 이는 절대 단칼에 좌절시키는 법이 없고 이뤄지지 않을 허상을 쫓게 하여 서서히 탈진시켜버린다. 그러는 사이 신세계의 원시적인 세력이 사방에서 파리처럼 날라와 실존의 구멍 사이사이에 불결한 알들을 까놓는다. 그리고 그 끝에 와서야 비로소 여정의 무상함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자네들을 도와주는 거야. 헛된 희망을 품지마. 자마의 말은 비쿠냐와 그의 일당을 격분시키고, 결국 그의 사지까지 앗아가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불구가 된 자마는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남아메리카의 풍경 속으로 기어이 빨려들어가 그 일부가 된다. 이토록 지독한 광경을 펼쳐보이면서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노렸던 것은 무엇일까. 희망을 품는 자들 마저 무자비하게 집어 삼키는 대자연 앞에 식민주의자들과 그들의 서구적 담론은 하찮아진다. <자마>는 대자연의 편에 선 영화다. 그러므로 이는 한없이 쪼그라든 인간의 모습을 보고 그저 낄낄대며 비웃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