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rry Sep 03. 2021

35년 된 새 접시를 찾아서

사소한 것들의 디자인사





물건에 애착이 많다. 언제부터일지 찾아보자면 30 인생을 훑어야겠지만 

아무튼 물건 하나 살 때도 장바구니에 오래 묵혀두고 꽤나 고심해서 고르는 편인 데다가 한번 내 것이 된 물건은 잘 잃어버리지 않아서 오래 사용하는 동안 자연스레 애착이 쌓이는 것 같다. 더욱이는 남발하는 소비사회에서 오래 쓸 수 있는 좋은 물건을 찾기란 생각보다 어려워서 아무튼 쓰던 것에는 사소한 물건에도 큰 애정이 있다.


그러던 중에 접시가 하나 깨졌다. 미련 없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자려고 누웠더니 버린 접시가 생각났다. 처음 독립하며 본가에서 가지고 나온 스프볼. 하얀색 원형 세라믹 볼에 동그란 손잡이가 하나 달려있어 한 손에 잡기 좋다. 유리 뚜껑과 한 세트라서 전자레인지로 모든 것을 요리하는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그릇이었는데, 싱크대가 작은 덕에 설거지를 하려고 모서리 한편에 쌓아둔 것이 떨어져 깨져버렸다.


구할 수 없는 것이 없는 요즘 세상이니까 그릇 하나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되지, 싶어서 인터넷을 샅샅이 찾았다. 그러다 닿은 뜻밖의 소식은 이 그릇이 지금은 단종되었고 아주 오래전 Grabit이라는 모델명으로 판매되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구글 연관검색어에는 이 그릇의 행방을 찾는 사람들의 아쉬움 섞인 질문과 답변들을 함께 볼 수 있었다.


더불에 위키피디아에는 이 그릇의 탄생부터 생산이 중단되기까지의 역사가 설명되어 있었다. 이 모델은 코닝사에서 1977년 처음 생산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당시 ‘전자레인지를 위해 만들어진 첫 취사도구 중 하나'이자 '뉴욕 스미소니언의 국립 디자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코닝웨어가 1998년 매각된 이후, 그랩 잇은 2000년대 초반 단종되어 현재는 같은 모델명 아래 변형된 디자인으로 판매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찾은 그랩잇의 사진들을 엄마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이렇게 생긴 코닝웨어 그릇이 집에 또 있는지 물었으나 뜻 밖의 기원을 들었는데, 방금 깨트린 이 그릇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 그러니까 거의 35년 전에 친척 어른이 골프대회에서 우승하시고는 상품으로 받아 우리 집에 선물로 주셨다고. 이후에는 내가 어렸을 때 이유식을 데워 먹었던.. 유서 깊은 그릇이라는 설명. 오래 쓴 그릇 하나 쨍그랑 깨뜨리고 미련 없이 버렸으나 이대로 두면 꿈에 나올 것 같았다.


ORIGINAL PACKAGE VINTAGE CORNING WARE 15OZ GRAB-IT BOWL UNOPENED BOX NEW (ebay)





꽤나 긴 역사를 알고 나니 지난 세기의 전유물을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는지, 월드와이드웹을 돌고 돌아 이베이에서 미개봉 박스 채 새 상품 그랩잇을 찾았다. 그리고는 해외배송비를 포함하면 $143.29 거금을 들여 그랩 잇 그릇 한 개와 유리와 플라스틱 뚜껑을 포함한 세트를 구매했다. 충동구매로 뿌듯한 마음도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바다 건너 배송 중인 그랩 잇. 환불하기는 이미 늦은 김에 코닝웨어와 그랩 잇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찾아보았다.


그랩잇을 생산한 코닝웨어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었다. 150년 전, 에디슨의 전구 유리를 만든 Corning Glass Works를 시작으로 1913년 파이렉스가 탄생했고, 이후 '내구성 있고 멋진, 세척하기 쉽고 다양하게 사용 가능한' 유리와 세라믹 쿡웨어 제품들을 제조해 왔다. 설립 이후 7만 5천 개의 코닝웨어가 생산되었으나 감소하는 판매량과 제조 설비 교체로 경영에 어려움을 맞아 1998년 World Kitchen사에 인수되었다.


"오븐에서 테이블 까지"라는 슬로건으로 1958년 시작한 코닝웨어는 70년대 결혼선물로 인기였다고 한다. 이후 미국에서 유행한 미드 센추리 모던 디자인의 영향으로 빈티지 코닝웨어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는데, 특히 코닝웨어가 인기 있던 시절 당시 이 브랜드를 사용했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향수에 다시 찾고 있다고 한다. 시대를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도 남겨진 향수 덕인지 빈티지 코닝웨어 유행에 동참하고 있는 것 같다.






Becoming a product designer : a guide to careers in design (Bruce Hannah, 2004)





코닝웨어의 인기가 실감 된다면 다시 그랩 잇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랩 잇을 디자인한 David Stowell은 2004년 쓰인 Becoming a product designer에서 그랩 잇이 그가 만든 처음이자 최고의 디자인이었다고 설명한다. 전자레인지가 발명되기 전인 1975년 처음 그랩 잇의 디자인을 고안한 그는 사람들이 수프를 요리하고 나서 서빙을 위해 새 접시에 옮겨 담는 것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수프를 따듯하게 유지하기 위해 캠프파이어 위에서 사용하는 래머킨(ramekin)의 용도에서 착안, 한쪽에 꽃잎처럼 동그란 손잡이가 달린 지금의 형태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이후 처음 진행한 포커스 그룹에서 소비자들은 처음 보는 형태의 그릇의 사용을 꺼려하고 공장에서는 동그란 모양의 손잡이를 유리로 만들 수 없다고 하고, 아무튼 실제 상품이 나오기까지 모두가 그랩 잇의 디자인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진행된 포커스 그룹 소비자 조사에서 실용성을 인정받았고, 이후 그가 디자인한 그랩 잇은 코닝사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제품이 되어, 4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단종을 아쉬워하며 수집하는 빈티지 디자인이 되었다.



Designing it was just
identifying a simple need
and fitting a product to it.


디자이너 David Stowell는 그랩 잇의 탄생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간단한 필요를 발견하고 이에 제품을 맞추는 일. 가파르게 짧아지는 유행의 주기 속에서 결핍 없이 살아가는 21세기 소비사회, 불편과 빈틈을 찾아가는 일이야 말로 가장 본질적인 디자인의 필요가 아닐까 스스로 되새긴다. ‘35년된 새 그릇 찾기’ 처럼 오래 쓸 물건을 사고 만드는 일, 지속 가능한 디자인은 앞으로 남을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일이다.











REFERENCES

Becoming a product designer : a guide to careers in design (Bruce Hannah, 2004)

https://www.timesfreepress.com/news/life/entertainment/story/2014/feb/15/corning-ware-collectibles-glass-expert-expla/131829/

https://en.wikipedia.org/wiki/Grabit_(cookware)

https://www.ebay.com/itm/333803609616?ssPageName=STRK%3AMEBIDX%3AIT&_trksid=p2060353.m2763.l2648

https://www.yourcookwarehelper.com/cookware-materials/glass-clay-cookware/corningware-pyrex-glass-cookware/



작가의 이전글 얼마나 로맨틱한 시대였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