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소중한 그 취향
문득.
어릴 적 취향이 평생 간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나에게 해 준 기억이 난다.
음악, 패션, 취미 뭐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어느 부분에서는 맞는 이야기이고, 또 어느 부분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릴 적 나는 왁자지껄한 것을 좋아했다. 그곳이 클럽이 되었건, 혹은 여러 사람과 함께 시끌벅적한 술자리 혹은 식사자리가 되었건, 나는 조용한 것 과는 맞지 않았다.
연인과 데이트를 해도 정적이고 차분한 데이트보단 시끄럽고 활동적인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듣는 음악 또한 어릴 적 내가 들었던 음악들을 생각해 보면 강렬한 힙합, 혹은 락 등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어릴 적, 2000년도 초 중반에는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는, 혹은 누군가 추천해 주는 글이 있는 플랫폼 혹은 커뮤니티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이버나 다음에 “강한 힙합” , “시끄러운 락” 등의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한 검색어를 넣고, 하나하나 나의 작은 mp3에 넣고 소중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야구를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캐치볼을 미친 듯이 좋아했다.
중학교 일 학년 때 점심시간에 공을 던지는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했으며, 부모님이 공부에 열중하라며 글러브와 공을 가져가셨을 때 나는 꽤 씁쓸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하루에 대략 100개 가까이 되는 공을 전력으로 던지고, 받느라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어깨는 종종 아프다.
액션 영화를 좋아했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꽤 많은 영화를 나와 나의 동생과 함께 보곤 했는데, 그때 보게 된 [다이하드]가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받아들여져 나는 한 동안 액션 영화, 특히 총을 쏘고, 폭탄이 터지고 하는 그런 류의 영화를 찾아보고 아버지에게도 비디오방에서 빌려 달라고 떼를 쓴 기억이 난다.
두 시간 가까이 되는 분량의 영화에서 한 장면도 부수고 쏘고, 터지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그 영화는 재미없는 영화가 되었다.
음악 취향은 변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 살 때는 액션 영화를 넘어 스릴러 영화까지 즐겨 보기 시작했다. 그때는 외국에서 합법적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예를 들면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가 나타나기 전이어서 나는 부끄럽지만 불법으로 그 영화들을 찾아보곤 했다. 구글에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스릴러 영화 추천] 등의 검색어로 영화를 찾고, 다운로드하고, 하루에 최소 한 편씩 그 영화들을 보았고, 그 영화들은 나의 취향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물론 아직도 시끄러운 음악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음악들이 정확히 ‘나의 취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내가 조심스레 선별해 놓은 애플 뮤직 플레이리스트에는 힙합 음악, 혹은 록 음악보다는 오히려 조금 부드러운 음악들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너무나 위대한 뮤지션이긴 하지만, 칸예 웨스트와 제이 지의 음악보다는 D4DV의 음악을 즐겨 들으며, MAC AYRES 같은 조용하거나 로파이한 팝을 즐겨 듣기도 한다.
크라잉넛 혹은 노브레인 등의 음악도 너무 좋지만 지금의 나는 짙은과 구원찬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조금씩 편안한 것들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하게 된다.
영화는 어떠한가?
아직도 나에게는 [세븐]과 [아이덴디티] [쏘우 1, 2]를 처음 보았을 때의 좋은 충격은 남아있다.
수많은 반전과 서스펜스로 장식된 이야기들은 아직도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하지만 즐겨 보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폭력의 이야기를 관람하는 것이 점점 나에게는 에너지를 쓰는 일이 되는 것일까 한다.
오히려 요새는 로맨스, 멜로 등의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한다.
오래전 영화지만, [어바웃 타임]은 나는 지금까지 열 번 이상은 다시 본 것 같다. 편안하고 잔잔하고, 때로는 미소 짓게 하는 이야기가 나에게 조금 더 안정감을 준다.
[올드보이]를 처음 보았을 때 받은 충격은 평생 잊을 수 없겠지만, [헤어질 결심]을 최근에는 더 좋아하게 되었다.
최근에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들을 볼 때 나는 전 후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충분히 준비하지 않으면 후유증이 조금 더 길게 남게 된다.
몸을 움직이는 것 또한 나에게는 시시해졌다.
십 수년간의 정신 질환과의 싸움은 나에게 엄청난 체중 증량을 가져다주었고, 이제는 즐기면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닌, 마음을 단단히 하고 생존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치고, 던지고, 달리고, 몸을 부딪히여하는 그 운동, 혹은 여가는 스트레스가 되었다.
정적인 무엇인가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조용하고 아늑한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생각하고, 글을 쓰고, 편안한 사람과 만나 조용히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것이 더욱이 편안함을 준다.
그래서 나는 해방촌 카페를 좋아한다. 부암동 거리를 좋아한다. 제주도 애월의 바다가 보이고 사람이 별로 없는 카페를 좋아한다.
나름 유명한 공간이지만 찾고 또 찾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 조용히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어쩌다 알게 된 재즈 아티스트의 음악이 귀에 들려올 때 내 코와 혀를 건드리는 커피의 향과 맛이 가끔씩 아름답기까지 하다.
취향은 정해진 것이 아닌 것 같다.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몇 년 뒤의 나는 싫어할 수도 있겠지.
다시 시끄러운 음악을 좋아하게 되거나, 혹은 전혀 다른 음악들을 좋아할 수도 있겠지.
조용하고 예쁜 영화들에서 벗어나 오히려 더 잔혹하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영화들을 즐겨 볼 수도 있겠지.
이상형도 수 없이 바뀌는 세상에서 취향이 종종 바뀌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리라 나름 합리화한다.
그래도 나는 하나 약속하고 싶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던, 혹은 싫어하던, 나는 그것들에게 최선을 다 할 것이라는 것을 약속한다. 애매하게 좋아하고, 애매하게 즐기고 “내가 그랬었지” 하며 서랍 속으로 숨겨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 뜨겁게 좋아하고, 뜨겁게 즐기고, 남아있는 것은 하얀 재 밖에 없을 때까지 뜨겁게 불태우며 좋아하고 즐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뒤를 회상하며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이런 것도 좋아했으며, 저런 것도 너무나도 좋아했다. 취향의 나이테는 결국 내가 나의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나타내는 표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좋아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나의 취향이 지금까지 천천히, 하지만 아름답게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쌓아 올렸는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일관된 사람이 아니다. 지금까지 수 차례 취향이 바뀌었으며, 이성을 볼 때의 기준도 자주 변한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나의 삶을 좋아한다. 비록 안타까운 면도 있는 것이 삶이라지만, 나는 내가 살아온 삶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다. 수 차례 고비를 넘기고 결국에 숨 쉬고 있지 않은가.
내가 앞으로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람 또한 이러한 이야기가 있으면 더욱 그 사람에게 매료될 것 같다. 각자가 좋아했던 것들을 찬찬히 꺼내서 이야기하며, 그 좋아했던 것들이 어떻게 지금 이 시간 서로를 만들었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나와 당신이 이제 조금씩 함께 만들어갈 취향을 기대하고 싶다.
그때 나는 나의 삶뿐 아닌, 당신의 삶 또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