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와 의욕 사이에서.
무료하다.
열 시 반쯤 느지막이 일어나 물도 끓이기 귀찮아 라면 하나를 부수어 먹으며 생각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직을 시도하였으나 수십 통의 이력서 발송 기록만 있을 뿐, 면접 제의라던지 혹은 입사 제안은 전혀 오지 않았다. 이전에는 보통 1~2주 사이에는 면접과 입사 제의들이 왔으나, 한 달 가까이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이도 이제는 스물아홉의 막바지라 웬만한 아르바이트들도 거절당하기 일쑤다.
이십 대 초반에 몸 쓰는 일을 워낙 많이 해서 그런지 허리와 무릎, 목은 고장이 나 몸을 쓰는 일을 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다행히 타투이스트로 활동 중이기에 몇 명의 손님들이 방문해 주어 어떻게든 생존하고 있으나, 모아둔 돈도 다 쓴 상황에서 나는 건실한 회사원에서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한 가난한 예술가로 전락했다.
돈이 다 떨어져 나중결제로 주문한 라면과 물, 햇반으로 끼니를 때우기로 한다. 밖에서 백반이라도 하나 사 먹는 것은 나에게는 큰 사치가 되어 버렸다.
올해 2월부터 부모님 집에서 독립하여 혼자 살게 된 후로 절실히 느끼는 한 가지는, 생존한다는 것은 나름의 비싼 가격이 붙는 행위라는 것이다. 호흡하는 것조차 유료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다지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탈이라도 한번 나는 날에는 가뜩이나 비싼 생존비가 두 세배가 되어 피부를 짓누른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최대한 빠르게 이직을 꿈꿨을 것이다. 예술로만, 글로만, 그림으로만 먹고산다는 것은 반항의 일종이기에, 생존 비용에 반항, 혹은 저항 비용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서서히 나를 그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이제는 생존과 저항은 나의 삶에서 하나가 되었다. 사실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작년 4월 이후, 나의 삶에서는 죽음이라는 선택지는 지웠기에, 나에게는 생존이라는 선택지 외에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웃기지 않는가? 작년까지만 해도 매일 다가오는 절망에 잠겨,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들 중 최악의 것들만 수집하여 죽음을 꿈꾼 내가, 이제는 죽음은 전혀 선택지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 웃기지 않는가?
생명의 모양과 죽음의 모양은 가장 닮아있으면서도 가장 다르다. 생명은 대가가 필요하다. 아이를 낳기 위하여 산모는 "고통"과 "헌신"이라는 대가를 지불한다. 누군가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면, 그는 "돈"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생명"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거주하는 것', 소위 의식주는 다 어떠한 형식으로든 대가를 취하고 나에게 그것들을 제공한다. 나는 결국 존재하려면, 생존하려면 누군가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떠한가? 죽음도 대가가 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이다. 다만 생명과는 다른 것은 생명은 자신이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 생존이라는, 생명이라는, 호흡이라는 것을 내가 받는다면, 그래서 내가 비루하지만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죽음은 '생명'을 가져간다. 죽음이라는 것을 기꺼이 맞이한다는 것은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죽음이라는 것의 아가리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 후의 것들은 각자의 사상과 종교가 다를 수 있기에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자. 생명을 가져간 죽음은 남은 자들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
생명과 죽음의 닮은 점이 하나 더 있다. 영향력이다. 삶은 빛을 낸다. 가장 비루한 곳에서 가장 비참히 생존하고 있는 누군가 일지라도, 그가 숨을 쉬고 있고, 치열히 삶을 살아내고 있다면, 그는 희미하지만 빛을 내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그 빛에 더욱 연료를 넣어 주고, 태양을 쬐여 준다면, 그는 더욱이 밝은 빛으로 자신의 주변을 비춘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떠한가? 죽음은 황폐하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이십 대의 후반이 될수록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이 생긴다. 장례식장은 어떠한가? 아무리 누군가는 웃고 떠들지라도, 그곳에 있는 누군가의 마음은 황폐해져 간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이를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절망은 상당히 크다.
지금 내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은, 이 도시는, 이 세계는 어떠한가? 불행하게도 생명의 향기보다 죽음의 악취가 더 가득하다. 이 악독하고 잔인한 세계는, 차가운 도시는, 짓누르는 시스템은 우리의 생명을 가져가려 한다. 어쩌면 이 사회가 작동하는 가장 큰 연료는 사람의 생명력이 아닐까, 사람의 생명을 취해 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잘, 더 많이 살고, 가지고 싶어서 누군가의 목을 비틀어 그 생명을 시스템에 헌납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그 자에게 무엇인가를 제공하겠지. 그래서 매일 어느 나라의 소식을 접하여도 비극의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겠지.
그래서 생존은 저항이다. 다만 모두가 같은 방향의 저항을 하고 있지는 않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여 저항하고 있다. 다른 방향으로 저항하고 있는 자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다들 각자의 신발을 신고, 각자가 추구하고, 원하는 것들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고군분투가 다른 이의 목을 비틀고, 다른 이의 감정을, 마음을 할퀴고 강탈할지언정, 그도 자신에게 소중한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하여 그런 선택을 하였을 테니.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저항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에게 저항함으로써 이 도시, 이 시스템, 혹은 나의 주변인들에게, 가족에게 목소리를 내어 항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방식으로든 예술가로 죽겠노라고 항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도시는, 나의 주변인은, 나의 가족은 내가 편안하고 안락한, 하나의 부품으로써 생존하기를 원하고 있을 수 있으나, 나는 그것을 거절하겠노라고 외치고 있으며, 나의 팔이 꺾이고, 다리가 부서지며, 언젠가 나의 목이 뒤틀려 이 땅을 등질지라도 나는 소리치며 사유하고, 무엇인가를 조각하고 그리겠노라고 외치고 있다. 생명을 앗아가는 이 도시에서, 이 땅에서 나는 오히려 저항함으로써,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다른 이에게 생명을 주리라 외치고 있다. 죽음을 원하는 이 땅에서 나는 누군가의 생존을 원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권태스러우면서도 누구보다 의욕으로 가득 차 있다. 아무리 항의하고 저항할지라도 철옹성 같아 보이는 벽을 바라보며 권태를 느끼지만, 언젠가 이 벽은 나의 발 앞에 모래 그 이상, 이하도 아닐 것이라는 단순하면서 초연한 믿음으로 인한 의욕이 가득하다. 아침에 눈을 떠 기상하면서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권태를 마주하지만, 무엇인가를 창작할 때, 사유할 때, 기록할 때 나는 그 누구보다 의욕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 비싼 일식당에서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으며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을 보며, 나의 즉석밥과 김, 라면으로 채워진 식탁을 보며 나름의 초라함과 권태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나의 입에 무엇인가를 넣고, 삼키고, 그것을 다른 창작으로 만들 수 있음에, 더 깊은 사유를 할 수 있음에, 그 사유가 무엇인가를 또 기록하여 내기에 의욕에 넘친다.
나는 머리에 띠를 두르지 않은 혁명가이다. 깃발을 휘날리지 않는 성난 군중의 선두이다. 침묵하는 아우성이며, 죽음을 몸에 새긴 생존자이다. 총을 들어본 적 없는 군인이며, 칼을 들어본 적 없는 의사이다. 순응을 거부하는 싸움꾼이다. 평화를 원하는 범죄자이다. 생명을 건네는 이름 없는 한 사람이다.
이 벽이 나의 저항을 거절한다면 나는 철저히 부딪혀 이 벽에 나의 이름을 새기리라.
이 땅이 나의 항의를 거부한다면 나는 철저히 부딪혀 이 벽에 나의 창작을 보이리라.
이 몸이 나의 거절을 거부한다면 나는 철저히 부딪혀 나의 몸에 삶의 기록을 새기리라.
생존을 선택한 순간부터, 나는 저항한다.
생존을 선택한 순간부터, 나는 항의한다.
생존을 선택한 순간부터, 나는 생존하며,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