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다 피웠다.
어제 담배를 끊어야 할 지에 대한 글을 적었는데, 그대로 편의점에서 4,800원짜리 담배를 구입하고,
전부 나의 폐로 밀어 넣었다. 호기롭게 담배를 끊겠다 다짐하였으나, 몇 시간도 지속되지 않는 나의 의지에 비웃음의 박수를 보낸다. 직장을 그만두고 보통 새벽 세 시에 잠이 들고, 오전 열 시에 일어난다. 일상이 되어버렸다. 오늘, 눈을 떠 보니 열 두시 반이었다. 아, 얼마나 허탈했는지. 프리랜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프리랜서라면 마땅히 규칙적인 생활이 필수라고 누군가 이야기하였으나, 그 규칙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깨 버리는 나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허탈했는지. 겨우 밥을 먹고, 사실 먹었는지 밀어 넣었는지 헷갈리지만, 휴대폰을 확인한다. 언제까지 밀린 대출금과 이자를 수납하라는 은행의 연락이 대부분이다.
지금 나에게는 현금이 없다. 당장 밥이나, 담배를 사 피울 수 있는 신용카드 한도도 현재 3만 원가량이 남아있다. 일이 잡혀야 돈을 벌 수 있는 타투이스트이기에 현재 한 푼도 없는 나의 상황은 가히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았던 것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매일 팔릴지도 모르는 그림을 그리고, 마플샵을 열어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던 것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에게는 현재 비어있는 지갑이 현실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원래 나는 차가운 커피를 좋아한다. 목을 차갑게 만들어주는 얼음과 카페인을 참 좋아한다. 그러나 요새는 집 앞 대형마트에서 구입한 커피스틱이 나에게 카페인을 공급해 준다. 배달음식을 참 좋아한다. 그러나 요새는 유통기한이 조금 지난 컵반, 혹은 집에 둔 지 9개월이 넘어가는 간편식이 나의 끼니를 책임진다. 졸지에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의미 없는 농담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노력과 현실, 그 사이에는 엄연한 괴리가 존재한다. 어릴 적 선생님들은, 혹은 유명인들은 노력하면 다 된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괴리를 뛰어넘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의 말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기 위한 최면이 아니었을까 하는 망상을 머릿속에서 펼쳐본다. 나는 열심히 음악을 만들었다. 그림을 그렸다. 글을 적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130원이 있는 통장 잔고와, 3만 원 정도가 남은 신용카드 한도, 그리고 빨리 돈을 갚으라는 은행의 독촉 문자와 전화이다.
그럼에도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혹여나 있을 협업 메일을 확인하며, 휴대폰의 스크롤을 아래로 내려 끊임없이 새로고침을 하는 것은, 일말의 희망일지, 혹은 절망을 확인하려는 행위일지 헷갈린다. 죽을 수 없는 운명이다. 죽기 싫은 운명이다. 작년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와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럴 수 없다. 살아보기로 다짐하였고, 살아보려 발버둥 친다. 확실히 죽음보다는 생존이 어렵다. 죽음은 종결이며 그 시점으로 완료되는 문장이지만, 생존은 진행형이다. 끊임없이 '나'라는 주어에 동사와, 목적어와, 형용사를 집어넣어야 완성되는 번거로운 문장이다. 그럼에도 나는 생존을 선택하였기에 끊임없이 창작하며, 끊임없이 사유하며, 끊임없이 기다리며, 끊임없이 발버둥 치며, 끊임없이 이 괴리의 쓴 맛을 온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식어버린 커피잔에서는 지독한 쓴 맛이 나의 목을 찌른다. 두 시간 뒤에는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 사실 그게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일, 혹은 모레까지 처리해야 하는 것들이 나에게는 더 크다. 그럼에도 앞으로 다가올 하루, 이틀, 일주일, 일 년을 위하여 여러 일들을 벌이는 것은 생존을 선택하였기에 해야만 하는 필수활동이다.
생존은 비싸다. 이제 서른을 맞이해야 하는 나에게는 더욱이 비싸다.
그럼에도 생존을 선택하였기에 오늘도 무엇인가를 만들고, 어떤 것을 하려 한다.
사랑을 위하여 준비하려 한다.
모두, 살아남는 12월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