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경계선 05화

첫눈이 왔어.

그날, 하얗던 날.

by TheGrace

첫눈이 왔어.

뜨겁고 또 뜨거웠던 긴 여름이 지나고, 언제쯤 날씨가 추워질까 기대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하얀 것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어.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는 추웠는지 하얀 옷을 꺼내 입었고,

검은 아스팔트는 자신의 색이 지겨웠는지 잠시 기분을 내어 하얀 드레스를 입었어.


부드러워 보였어. 소복이 쌓인 그 길을 걷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부드럽고 아름다웠어.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지만 귀여운 소리가 났어.


원래 나는 날이 추우면 고개를 숙이고 걷는 게 습관인데,

하늘을 보며 걸음을 옮겼어. 아름다운 것을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어.


안녕, 안녕, 잘 지내는지 궁금해졌어. 소식을 듣지도, 전하지도 못할 사이가 되었는데도,

잘 지내는지 궁금해졌어.

그때 자주 들었던 곡을 기억 어딘가에서 꺼내어 들으며 혼잣말을 했어.

만약에, 정말 만약에 너를 우연히 마주칠 때 해야 할 첫마디를 입술 끝에서 조용히 굴렸어.


너무 추운 날씨를 싫어했는데 눈 오는 날은 해맑게 웃으며 좋아했던 그 모습이,

창 밖으로 아름다운 하얀 것이 쏟아지는 게 보이는 조용한 찻집에 앉아 몇 시간이고 서로에 대하여 떠들던,

더 빨리 만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밝은 낮부터,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은 그 밤까지 이야기하던 그날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자고,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어주자고 다짐했던 그 밤이,


수 백 번 이상의 밤과 낮을 지나고, 십 수 번의 계절이 바뀌고, 몇 명의 삶과 죽음을 지켜보고,

몇 번의 공전이 지나갔는데도 세상이 하얗게 덮이면 생각이 나.


몰랐었어. 새하얀 세상을 만들어 준 눈은 결국에는 녹아서 누군가의 발걸음을 방해하는 웅덩이가 되더라.

하얗게 덮였다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결국에는 다시 겨울의 앙상함이 드러나더라.

한편에 치워놨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을 모두가 바라더라.


네가 그랬듯이.


내 세상을 하얗게 덮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눈이 녹았을 때 너도 그렇게.

서로 몇 시간을 미래를 그리며, 서로의 집이 되어주자고 했던 말은 흔적도 없게.

그래서 지금은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혹여나 다른 누구와 하얀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도 나는 모르게 했어.


그래서 나도 너를.

나도 한쪽에 그 기억과 너를 쌓아두고, 녹아 없어지기를 바랐는데,

눈이 다시 왔어. 눈이 다시 와서 쌓이고, 그때의 흔적들을 쌓아 올렸어.

몇 번의 공전이 오고 갔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다시 왔어.


다시 눈이 녹는 때가 오면, 다시 한쪽으로 밀어둘게. 다시 한쪽으로 밀어서 보이지 않게 할게.

그리고 기다릴게. 네가 다시 돌아오는 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언젠가 다 녹을 때를 기다릴게.

언젠가 네가 다 녹아서, 나도 다시 누군가와 하얀 세상을 만들 날을 기다릴게.


이제 너도, 네 하얀 세상을 만들고,

나는 나의 하얀 세상을 만들게.


그리고, 온전한 행복과, 온전한 편안함을 찾는 그날이 너에게도, 나에게도,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오기를 기도할게.


첫눈, 그 첫눈을 이제 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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