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최선의 삶》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 그래서 부담이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최선의 삶’이라는 제목에 손이 간 이유는 그러하지 못한 나에 대한 반성이며 후회였을 테다. 아니, ‘가끔은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위안을 책 속에서 찾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조금은 쉬어도 돼.’ 혹은 ‘지치면 울어도 돼.’ 같은 말들. 최선(最善)이 항상 최선(最先)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 책은 평범한 성장 소설이다. 오해하지 말자. 어느 학교, 어느 무리에나 있을 법할 만큼 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평범함을 동경했지만 평범할 수 없었던,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1. 옆으로 누워 옆으로 살았다. 광어에게는 그게 정상이었다. (68.p)
강이는 광어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조금은 서글프다. ‘물고기 중에서 광어가 제일 좋았다. 광어의 얼굴은 모두 똑같아 보였다.’ (68.p) 단순히 광어가 맛이 좋아서 혹은 예뻐서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모두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모두 똑같아 보이는 광어에겐 편견도 따돌림도 없을 테니까. 보통 편견과 따돌림은 다름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사실 다름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일까? 이는 다름을 틀림으로 오인하는 사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조차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다름과 옳고 그름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인데 말이다. 누군가에겐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도 다른 누군가에겐 지극히 정상적인 것일 수 있다. 기억하자. 다름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2. “강이야, 고등학교 가야지.” (p.122)
진학만이 최선. 하지만 이것은 학생의 최선이 아니라 학교의 최선이다. 학교는 그저 학교의 인지도, 평판만을 중시하며 학생의 일에는 일관되게 방관자적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학교 폭력의 피해자는 오히려 밀고자가 되어 선택을 강요받는, 너무나도 부당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싸운 걸 인정할래, 없었던 일로 할래. …(중략)… 네가 피해자라고 말하니까 학교에서 너한테 특별히 선택권을 주는 거야” (p.122) 그러나 이러한 특별함은 학생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학생은 평범함을 원한다. 강이 또한 그렇다. 사실,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평범함이란 무엇일까? 모든 학생을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평범함 아닐까? 아무런 편견 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대해질 때, 비로소 모두가 평범해질 수 있는 것처럼.
3. 축하할 것이 없었다. …(중략)… 케이크는 언제나 축하받을 만해 보였다. (p.70~71)
아람이 사온 케이크. 강이, 아람, 소영 그리고 길고양이 이 넷을 위한 네 개의 초. 하지만 밝게 빛나는 초를 앞에 둔 넷이 마주한 현실은 어둡고 입가에 묻은 생크림처럼 더럽다. 축하할 일로 가득할 줄 알았던 매일은 무엇을 축하해야 할지 모르는 날의 연속이 되었다. 사실, 자신들의 매일은 축하받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입가에 묻은 생크림과 소영의 흰 운동화 끈이 더욱 하얗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4. “나 좀, 응원해 줄 수 있을까.” (p.109)
최선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며, 어떤 이의 최선은 다른 이의 최악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누구도 최선을 강요할 수 없다. 병신이 되지 않기 위해 강이도, 아람도, 소영도, 그리고 엄마도 그저 각자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다 힘이 들면, 조금은 쉬어도 된다. 잠시 멈춰도 된다. 그것 또한 현재의 최선일 테니. 그렇기에 “학교 잘 마치고 집으로 올 거지?” (p.110)라는 어머니의 말이 더 슬프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