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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akonomist Oct 21. 2019

취준생은 설거지할 때 행복하다

취준생의 업(業)은 취업 준비다.


직업이 뭐예요?-묻는 말에,

취준생이에요-하고 답한다.


취준이 직업인 내 첫 일과는 일터로 떠나는 부모님을 신발장에서 배웅하는 일이다. 부모님이 나가고 문이 닫히면 조용한 집의 적막을 느낀다. 그 적막함은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체크무늬 잠옷을 입은 29살 아들이 은퇴할 나이를 지난 부모님을 일터로 보낸 모습을 신발장 조명등이 껌뻑껌뻑하며 밝힌다.


그 부끄러움이야말로 취준생의 하루를 움직이게 하는 각성제다. 직장인이 아닌 나는 아메리카노 대신 부끄러움을 한 사발 들이키고 각성한다. 책상에 앉아 입사 원서를 쓴다. 이미 미래를 향해 저만치 내달리고 있는 마음과 달리 워드(word) 위 커서는 제자리에서 깜박거린다. 이 나이 먹도록 뭐 하나 내세울 게 없구나-생각한다.


그래도 인간은 상상의 동물이다. 구라를 적절히 섞고 과대 포장한다. 이 구라와 과대 포장의 작업은 래퍼들이 랩을 쓰는 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입사 경쟁은 쇼미더머니의 또 다른 버전이다. 쇼미더머니엔 실력 있는 래퍼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걸 보면 우리나라엔 랩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구나-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나라엔 랩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돋보이려면 난 더 화려한 랩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컴퓨터에 랩을 토해내고 노트북을 닫는다. 연예인들은 이것을 무대 후유증이라고 하는가. 나는 다시 현실을 마주하고 하루가 또 한 번 공회전했음을 느낀다.


부모님이 퇴근하시기 전 저녁 준비를 한다. 아, 그전에 쌓아두었던 설거지부터 해결해야 한다. 고무장갑을 끼고 물을 튼다. 접시에 붙은 큰 찌꺼기를 먼저 제거하고 설거지 할 순서에 맞춰 접시를 쌓는다. 이렇게 해야 설거지가 수월해진다. 이것은 반복적 수행을 통해 내가 얻은 일종의 경험칙 같은 것이다. 설거지는 내 계획에 따라 차례대로 진행된다. 그에 따라 건조대에 깨끗한 접시들이 하나, 둘 도열한다. 텅 빈 싱크대를 보며 뭐 하나 내 맘 같지 않았던 하루와 내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실낱같은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내일도 내일의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음에 안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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