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침에 일어나면 카카오톡부터 확인한다. 미국 사는 누나가 얼마 전 출산한 딸 사진과 동영상을 종종 보내온다. 아침 안방 문틈 사이로 봤던 동영상을 보고 또 보는 엄마 모습이 보인다. 엄마는 휴대폰 속 손녀딸을 확대해보고, 어루만져 보고, 말도 걸어본다. 그렇게 동영상 하나를 사골국 끓이듯 보고 나서야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아침 밥상 주제도 자연스레 손녀딸이 된다. "그 녀석 어쩜 그리 귀여운지,,," "눈이 똘망똘망한게 크게 될 놈이야" 같은 말을 연발하며 손녀딸 생각을 반찬 삼는다. 대화가 한창 오가고 나면 엄마는 "내가 한 번 (미국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하신다. 그러면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단칼에 자른다. 엄마가 장거리 비행과 시차 적응, 서양 음식 등을 견딜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잘 안다.
죽을 때까지 일하고 싶다-고 엄마가 말했다. 그랬던 엄마도 요즘엔 하루 일하면 이틀은 쉬어야 한다. 몸이 예전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몸 생각 좀 하라고 잔소리해도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일을 하신다. 그러다 몸살에 걸리는 일이 다반사다. 요즘엔 낫는데도 더 오래 걸린다. 그러면 엄마는 "예전엔 이렇게 일해도 끄떡없었는데..." 하신다. 그 말씀을 하실 때 엄마의 눈동자는 조금 흔들린다.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다는 증명은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본인을 위한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 그 사실과 대면하기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건 아들인 나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이었던 존재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넘기기 힘든 알약과도 같다. 엄마 본인은 매일 그런 알약을 삼킨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 주고 싶은 손녀딸을 생각할 때마다 커다란 알약이 목구멍을 콱 막는다. 그 표정 속엔 미안함, 좌절감 등이 뒤섞인다.
그때 카카오톡 영상통화 신호음이 울린다. 누나다. 한국이 아침이면 미국은 밤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여유가 생겨 전화했으리라. 엄마는 빨리 손녀딸을 보여달라고 재촉한다. 누나가 카메라를 아기 쪽으로 비추면 아기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우리가 보이는지 가끔씩 빵긋 웃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는 엄마 얼굴에도 웃음꽃이 핀다.
그 웃음의 여운은 길다. 전화 통화가 끝나도 엄마는 말없이 웃고 있었다. 눈동자엔 생기가 돌았다. 엄마는 식사를 갑자기 마치시더니 나갈 채비를 하셨다. 난 아직 밥을 먹고 있는 채였다. 엄마는 마지막 한 숟가락을 뜨려는 나에게 "오늘도 파이팅!"하고 허겁지겁 일터로 떠나셨다. 그 목소리에서 전에 없던 활력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