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렌의 가을 Mar 20. 2018

나타나는 것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들은 모두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약속 장소를 정하다가 내가 기억해 두었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몇 년 전 한 번 가본 후 꼭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3월의 월요일 오후였다. 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니,라고 생각하며 나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에 올랐다. 일과 관련되지 않은 만남을 평일 오후에 갖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날씨도 좋았다. 3호선 지하철을 타고 2호선으로 갈아탄 후 합정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망원동까지 갔다. 느긋하게 버스에 앉아 신촌과 서대문을 지나는 길을 바라보았다. 개구리가 깨어나는 때라더니 정말 거리의 분위기는 달라 보였다.

검은색 기다란 화통을 어깨에 맨 젊은 여자가 버스에 오른다. 벨벳처럼 윤기 나는 재질의 검정 상의 위로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내려앉아 있다. 그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나는 궁금해진다. 산울림 소극장을 지나 버스는 동네를 돌았다. 내게 아주 익숙한 곳은 아니지만 약간의 인연이 있어 나는 이 동네를 친근하게 느낀다. 햇빛이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약속 시간은 아직 여유 있게 남아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커피숍을 찾아갔다. 작은 철문 하나 외에 별다른 간판이 있는 곳이 아니어서 찾기가 쉽지는 않은 장소였다. 휴대폰을 들고 지도를 찾아보았다. 같은 건물에 물고기와 새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사방의 골목을 들여다보았다. 한쪽에서 푸드덕 소리가 났다. 노란색 깃털의 새들이 새장 안에서 날개를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먼저 자리를 잡아두고 책을 읽고 있을 계획이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카페 줄이 길어 걱정했는데 오늘은 대기자가 없어 다행이었다.

검은색 철문 손잡이를 반갑게 당기자 지하로 연결되는 입구가 보였다. 불이 꺼져 있었다. 위험한데 왜 불을 껐을까, 하며 조심스럽게 좁고 긴 계단을 살금살금 내려갔다. '저 문을 열면 음악과 커피 향이 확...' 생각만으로도 흐뭇했다. 기분 좋은 기대였다.


photographed by Clem Onojehguo

그러나 문은 잠겨 있었다. 혹시 브레이크 타임이 있을까 며칠 전 미리 전화까지 하고 온 길이었다. 나는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쿵쿵 철문 흔들리는 소리가 좁은 계단에서 크게 울렸다. 철커덕. 다행히 얼마 안 가 안 쪽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반갑게 올려다보는 내게 무표정한 얼굴의 그는 말했다. "오늘은 문을 닫는 날인데요. 매주 월요일마다 쉽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전화로 "오후 3시에도 여시죠?"라고 물었고 "네. 저희는 1시부터 엽니다."라는 답을 들었었다. 요일은 묻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계단을 올라와야 했다. 어두운 계단이 무서워 핸드폰 라이트를 켰다. 두 시간이 걸려 이 곳에 온 길이었는데 닫힌 문을 만나다니. 마침 함께 오고 싶었는데 아쉬웠고 사람들을 헛걸음 시키는 것도 미안했다. 근처의 다른 커피숍을 찾았지만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었다.

결국 건너편의 카페로 들어가 일행에게 연락을 했다. 깨끗하고 새로운 디자인의 카페였지만 의자가 편하지는 않았다. 글쓰기처럼 오랜 시간 앉아 일하는 이들에게 편안한 의자는 참 중요하다. 긴 시간 글을 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집중한 채 한 자세를 취하게 되고 일을 마치고 나면 목과 어깨가 뻐근해지는 것이다. 처음 가려고 했던 카페는 편안한 의자가, 풍부한 사운드의 음악이, 읽고 싶은 책들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내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갖춘 곳이라고 하면 되었다.


드디어 사람들이 도착하고 우리는 반갑게 인사했다. 서로에게 일어난 삶의 변화들을 공유하고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편안한 자리이기만 하다면 글 쓰는 이들의 대화는 참 재미있다. 그들에게는 역시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삶에 대한 각자의 생각과 견해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내 삶의 일부분을 깨닫게 된다.


훌륭한 이야기는 어쩌면 진솔함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즐거운 대화의 자리를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어떤 솔직함과 신뢰가 있다.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그 자리에 어떤 신뢰가 존재하지 않으면, 말하자면 찧을 것은 많다 하더라도 막상 그 도마가 튼튼하지 않으면, 말이 잘 지 않는다. 순정품의 도마여야 한다고 할까. 무엇이 기뻐할 일이고 무엇이 슬픈 것인지,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고 무엇이 자랑할만한 일인지에 대한 조용한 합의가 거기에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지만, 확실히 아는 것이라면 설명을 붙여 조언하기도 한다. 자주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그 바탕에는 정중한 면이 있다. 그런 자리라면 주제와 상관없이 마음이 열리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커피숍을 찾았다. 이번에는 편한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다 같이 말하며. 우리는 등을 펴고 편하게 앉아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출판사가 운영하는 책이 가득 놓인 카페였다.


한참 대화를 듣고 있던 중이었다. 한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아는 얼굴이었다. 나의 친구의 친구였다. 그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잠깐 그렇게 생각했을 뿐 나는 다시 대화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우리는 한동안 남은 대화를 이어가다 시간이 늦어지자 지하철역까지 함께 걸어갔다. 그렇게 나도 집을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내려 집을 향한 출구로 걸어 올라갔다. 유난히 긴 지하도 계단을 걸어 밖으로 나왔다. 지하철의 훤한 형광등 아래 있다 나오니 눈이 편했다. 밤이었다. 혼자 걷는 밤은 참 오랜만이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가슴이 메어오고 눈시울 뜨거워졌다. 내가 왜 이러지. 옆쪽 찻길로 버스들이 지나가고 창가의 사람들이 일렁거려 보였다. 볼 위로 차가운 것이 흘러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외투를 펄럭거리고 나는 한 걸음씩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잊고 있던 무언가가 불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오늘 본 그 친구의 모습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친구의 모습으로 화한 그의 모습이었다. 아까 카페에서 스친, 처음 본 그가 힘차게 걸어가던 모습이 눈앞에 커다란 화면으로 열리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있는데, 저렇게 커피를 마시고 뚜벅뚜벅 걷는데,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시간이 꽤 흘러 이제 지난 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나 자신의 어딘가는 그것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훌륭한 연구자였고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나는 종종 글을 쓰고 나면 그에게 보내주곤 했다. 늦은 밤이라도, 새벽이라도. 때때로 그는 내가 쓴 글을 세상에서 처음으로, 가끔은 유일하게, 읽었던 사람이었다. 글을 보내면 그는 빠짐없이 자신의 답을 보내주었다. 나 자신이 나를 의심할 때조차 그는 나에게서 본 무언가를 한결같이 지지하고 믿어주었다. 나는 그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배웠다.


내 글이 세상으로부터 작은 인정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나보다도 더 기뻐했다. 어느 저녁 퇴근 후, 빵집에 마주 앉아 새삼 실감하며 그 일을 축하했던 날이 기억난다. 그 상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었지만 또한 그에게 주어진 것과도 같았다. 진심으로 기뻤다.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어서.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그가 나의 글을 읽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 당연히 여길만한 것은 없었다. 인간으로서 미래를 확신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행복의 순간을 미래로만 미루는 것이 결국 나의 무지와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나는 그를 통해 절실히 배웠다. 만나고 싶어도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순간은 오고야 만다.


photographed by 엘렌의 가을

그 밤, 길을 걸으며 지금까지 내가 잃은 것과 내가 얻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떠나보내야 했던 친구와 새로 맞는 친구들, 만나 온 사람들과 앞으로 만날 사람들, 걸었던 도시와 앞으로 걷게 될 도시들. 삶이 전하는 기쁨과 불가피한 슬픔 같은 것들이 가로등 불빛 사이로 오고 갔다. 나는 그 모든 것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때로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무언가가, 누군가가 이렇게 나타나곤 한다. 그 나타남 속에서 우리는 다시 만난다. 그것이 환상이라 할지라도, 신기루라 할지라도, 꿈이라 할지라도. 고통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빛이라 할지라도.


드디어 집까지 이르는 마지막 몇 개의 계단을 오르자 눈앞에 익숙한 현관문이 나타났다.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패스워드를 누르자 당연하다는 듯 문이 열리고,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오래간만에 늦은 나를 반기며 다가온다. 코트에는 아직 차가운 공기가 묻어 있지만 눈물은 날아갔고 나는 옅게 웃는다. 이건 꿈이 아니다, 여긴 나의 삶 속 모든 순간들이 날 이끌고 온 바로 지금 이곳이다. 창문 너머 밤하늘을 훌쩍 뛰어 걸어가는 친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떠올랐던 문장은 나의 말인지 그의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제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photographed by 엘렌의 가을



text by 엘렌의 가을

title photography by Alex Knight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