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슈가 Jan 30. 2020

팝 계엄령

지난봄, 내 애인이었던 남자 Z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대부분의 커플이 알고 있어도 외면하는 그 사실.


“나 사실 네가 좋아하는 것 중에 싫어하는 거 많아.”


헉.


“뭐 있는데.”

“팝.”


얼탱이가 없었다. Z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드벨벳의 <빨간 맛>을 스피커로 꽝꽝 틀어놓았으며 갑자기 태양이 너무 좋다며 <눈, 코, 입>을 흥얼거리던 사람이다.


“너도 팝 좋아하잖아.”

“아니 그 팝 말고 미국 십 대들이 좋아할 것 같은 그런 팝 있잖아. 그런 거 별로야.”


그날 이후, 우리의 데이트 재생목록에는 ‘팝 계엄령’이 내려졌다. 계엄령을 내린 사람은 당연히 Z였다. Z는 내가 뭐만 틀면 어? 팝이네, 했다. 나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걔가 뭐만 틀면 야 이거는 팝이잖아, 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때의 내가 보기엔) 꽤 멋진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모르는 아티스트의 유튜브 링크를 하루에 몇 개씩 보내주었다. 그중 남자애들만 내가 팝을 듣는 걸 몹시도 새삼스러워했다. 오아시스를 ‘형님들’이라고 부르던 애는 ‘네 취향은 솔직히 록이 아니라 팝 쪽이지.’라고 했었다. ‘네가 이런 노래도 알아?’ 했던 애는 ‘넌 이런 노래까지 듣는구나.’ 했었다. 이런 일을 나만 겪은 게 아니다. 테크노를 좋아하는 멋진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자신의 전 남친도 친구 앞에서 굳이 ‘내 여친은 엑소를 좋아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인정머리 없는 자식들에게 반한 건 나에게도 인디 록을 좋아해 온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아는 형이 하는 밴드’ 공연에 몇 번씩 가진 못했지만, 고등학교 때 받던 장학금을 ‘문화 활동’ 명목으로 공연 보는 일에 썼다. 홍대 인디 신 전성기 때는 아기였지만, 박준흠의 책 대한인디만세』에 나오는 홍대 라이브 클럽을 보며 언젠가 매주 클럽 공연에 다니는 어른이 되기만을 꿈꿔왔다. 나도 나름 반에서 한 홍대병하는 애였단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도 내 팝 취향을 좀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에게 팝은 언제나 ‘숨어 듣는 명곡’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케이티 페리가 처음으로 내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팝 콘서트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이건 절대 놓치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 당시 그의 노래 <Teenage Dream>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은 대단했다. 아얌을 쓰고 나온 케이티가 다섯 번 넘게 갈아입은 옷들은 모두 멋졌고, 100톤 규모의 무대장치는 환상적이었다. 그의 셋 리스트는 고급스러웠으며 라이브는 완벽했다. <Firework>를 목이 터지게 따라 부르며 생각했다. 이것이 진정성이 아니면 뭘까? 자본과 마음이 합쳐지면 최고가 나오는구나! 팝을 부끄러워했던 게 부끄러웠다.


한편, 지나간 사랑들의 취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들의 대외용 음악 플레이리스트는 짧았고 그들도 ‘숨어 듣는 명곡’을 가지고 있었다. 오아시스 형님들을 좋아하던 아이가 ‘요즘 들을 게 없어서….’하면서 지난번과 지지난번 데이트와 비슷한 록 레퍼토리를 틀던 날이었다. 나는 그의 플레이리스트 사이에 숨어있던 <쇼미더머니> 앨범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도 지금은 당당해졌길! 콩깍지가 벗겨질 때쯤마다 그들의 허세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Z의 취향은 좀처럼 시시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Z도 그걸 알았다. 재수 없긴 해도 그의 ‘진정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Z를 따라잡아야겠다는 생각도 잠깐 했다. 하지만 Z는 네 개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유저였고 밖에서 이어폰을 빼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 수는 없었다. 그냥 걔가 보내주는 음악을 잘 주워듣기로 했다. 그리고 팝을 듣는 것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팝의 멋짐을 모르는 삶은 불쌍하다. Z는 얼마 전 나에게 브루노 마스가 좋다고 했다.


♪ I'ma get your heart racing ♬
♪ In my skin-tight jeans ♬
♪ Be your teenage dream tonight ♬

- Katy Perry, <Teenage Dream> (2012) 中
작가의 이전글 빨간 약의 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