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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슈가 Jan 16. 2020

빨간 약의 맛

열여덟이었던 나는 마음이 급한 페미니스트였다. 한국에 페미니즘의 바람이 불어오던 2016년, 친구를 따라 듣게 된 여성주의 수업에서 큰 충격을 받았고 누구라도 이 거대한 불평등을 모른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외로웠던 나에겐 이 거대한 파도를 같이 타 줄 친구가 필요했다. 나는 친구들을 계몽하는 일에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그 계몽은 매우 서툴렀다. 페이스북에 다량의 글을 공유하고 뉴스 봤어? 하면서 친구들에게 말을 붙이고 말이 통하는 친구들과 탄원서를 썼다. 이런 나를 피곤해하거나 반박을 해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런 아이들은 오히려 내 의지를 타오르게 했다. 너도 언젠가 내 말을 이해하는 날이 올 거야.


오랜만에 맨날 붙어 다녔던 중학교 친구 H를 만났다. 개척되지 않은 퓨어한 상태의 H를 본 나는 결심했다. 


‘이 여자에게 내가 오늘 반드시 빨간 약*을 먹이리라.’


나는 한국의 불법 촬영 문제, 명절의 풍경, 성별에 따른 교복 차이 등등 각종 카테고리의 여성 혐오를 늘어놓으며 열변을 토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에 별 감흥이 없었는지 H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신기하다. 우리 둘이 이런 점에선 생각이 다른가 봐.”


그렇게 말할 문제가 아니라, 하는 대답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의 소중한 친구 H와 굳이 싸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입씨름만 하다 헤어질 순 없지. 화제를 돌렸다. 날은 저물어서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지하철을 탔다. 피로한 대화에 우리 둘 다 진이 빠져버린 걸까. 우리는 4호선에서 자리를 차지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누군가 우리를 깨웠다.


“저기요.”


일어나 보니 젊은 여자 세 명 정도가 우리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네?”

“저 사람이 몰래 그쪽 다리 찍은 것 같아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중년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표정이 잔뜩 굳어있는 게, 주변의 이야기를 이미 들은 것 같았다.


“저희가 얘기는 해놨거든요. 그래도 한 번 갤러리 확인해보세요.”


무서웠다. 생사람 잡는 거냐고 괜한 사람 의심하지 말라고 되레 화를 내면 어쩌지. 하지만 내 사진이 그 사람의 핸드폰에 남아있는 것이, 그 사진이 어딘가로 퍼지는 것이 몇 배는 무서웠다. 그리고 옆엔 도와줄 사람들도 있었다. H와 나는 그 아저씨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몰래 사진 찍으셨냐고 갤러리 좀 보여달라고 했다. 이미 지웠는지 다행히 우리의 사진은 없었지만, 그의 갤러리는 매우 수상했다. 여러 살색 사진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사진들이 어디서 찍은 건지, 저장한 건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머리가 아팠다.


상황을 넘기고 싶어서 정신없이 옆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H가 입을 뗐다.


“네가 아까 말한 게 이런 거였구나.”


늘 친구들의 공감을 원했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H가 평생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그날 우리는 서로를 토닥이며 헤어졌다. 울고 싶은 마음을 안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졸업을 하고 시간이 흘렀다. 나는 전보다 여유로운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H는 단단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다른 여자 친구들도 ‘네가 말한 게 뭔지 이제 알 것 같아.’하는 반가운 연락을 해왔다. 그 뒤에는 욕이 이어졌다. 뭘 자꾸 가르치려는 선배, 자기 손으로 밥도 안 해 먹으면서 ‘너도 메갈이 된 거야?’ 하는 오빠, 성희롱하는 택시 기사, 그간 겪은 성폭력 경험들….


우리가 먹은 빨간 약은 달콤하지 않았다.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쓴맛이거나 눈물의 짠맛이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고 했다. 여자들은 똑똑해서 상처를 앎으로 바꿀 줄 알았고 내가 아는 것을 네가 안다는 얘기는 반가웠다. 하지만 그게 상처를 받아야만 알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상처까지 반가워할 자신은 없다.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소재로, 넓은 의미로는 '기존의 가치관을 바꿀 만큼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이게 만든 어떤 것'을 뜻하게 된 말이다. 페미니즘적인 의미의 빨간 약은 '여성혐오의 존재를 인정한 시점 또는 그 계기' 즉 페미니즘을 뜻한다. (출처: 페미위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2013)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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