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지 않아도 일상을 의미있게 보내는 일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일상에서 즐기는 예술도 조금 알 것 같고 멀리가지 않아도 일상을 여행하듯이 사는 기분을 자주 느끼려고 하고 있다. 청양에서 지내다보니 주변에 부여, 공주, 홍성, 대천, 예산으로 많이들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주는 오래전부터 여러 번 가봐서 패쓰. 대천바다도 몇 번 가봤고 부여는 주말에 딸과 수북로1945라는 카페에 찾아가기 위해 다녀와봤다. 홍성은 뭐가 유명한지 아직 잘 모르겠어서 패쓰. 백종원 때문에 예산시장이 많이 알려졌던데 예산에 가보자. 마침 운전면허증을 갱신하고 발급받을 수 있는 곳이 한국도로교통공단 예산운전면허시험장이어서 딱이다.
청양에서는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면허증만 찾고 오긴 억울하니까 움직인 김에 주변에 가볼만한 곳이 어디있나 검색해봤다. 둘러볼 만한 곳으로는 '추사김정희 고택'이 있고 카페로는 유명한 곳이 정미소 건물을 재활용한 '카페이리정미소'가 궁금해서 두 군데를 들러보기로 했다.
김정희 고택은 그의 증조부 김한신이 지었고,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었던 분이다. 원래는 53칸이었는데 1973년에 복원할 때 지금의 규모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김정희의 묘, 추사 기념관, 월성위 김한신의 묘, 화순옹주 홍문, 백송공원이 있어 제법 넓다.
건물 곳곳에 붙여놓은 김정희 선생의 글씨현판들이 인상적이었다.
손이 시리도록 추운 날씨였는데 평일 오전이어서 사람은 거의 없어서 혼자 조용히,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마치 내가 과거로 여행온 듯한 느낌으로 머무르는 묘한 기분이랄까. 건물 뒷편도 살펴보고 굴뚝도 보고, 서까래를 유심히 보았다. 아궁이 위로 필로티처럼 높게 만들어진 다락같은 공간의 구조가 특히 눈에 띄었다.
담장을 따라 경사진 곳을 올라가니 김정희 선생의 초상화(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가 있는 건물이 있었다. '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은 김정희 선생이 돌아가신 후 1년 뒤에 친구인 이재 권돈인 선생이 쓴 것이라고 한다.
방명록에 이름도 남겨보고 담장아래로 나무며 주변을 내려다보니 파란 하늘과 함께 주변 경관의 조화가 너무나 보기 좋았다.
둘러보고 나오는 쪽 문 앞에 우물이 있다. 우물과 관련한 김정희 선생의 탄생 설화가 적혀 있는데 그가 24개월만에 태어났으며 출생하던 날 우물이 말랐다가 다시 샘솟고 주변 나무가 시들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고 한다.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는 여러 증거가 있었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게 아닐까.
추사 기념관이 바로 옆에 있어서 들렀다. 언 몸도 녹일겸 아주 느리게 둘러보았는데 그의 일생과 작품, 설명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김정희 선생의 묘도 볼 수 있었는데 아주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뭉게 구름 가득한 하늘과 소나무들이 같이 어우러져서 장관을 이루었다. 이런 자리에 묻혀있으면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 들면서 명당이지 않을까 짐작해봤다.
화순옹주 홍문까지는 걸어가봤는데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가져와 직접 심은 백송이 있다는 곳까지는 못갔다.
좀 떨어져 있어 걷기는 멀고 차를 끌고 가기에는 애매한 거리인데다꼭 그 나무까지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뭔가 덜 보고 가는게 있어야 다음에 또 오지. 그렇게 다시 와볼 여지를 남겨두고 간다.
9시 반에 도착해서 12시가 넘을때까지 둘러보았더니 춥고 배가 고팠다. 이리정미소까지 20분 정도 걸렸는데 건물이 커서 멀리서도 한 눈에 보였다. 가을에 왔으면 주변 식물들이 보기 좋았을텐데 지금은 황량해져서 사막같은 느낌을 풍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데다 층고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서 놀랐다.
정미소 건물을 활용하면서 일부러 뒤에 기계들을 철거하지 않고 이색적으로 남겨두었나보다. 공장같기도 한 낡은 느낌과 카페의 인테리어는 미래적이고 심플해서 오묘했다. 군데군데 테이블들이 놓인 공간들마다 컨셉도 달라서 독특했다. 층고 높은 곳을 좋아하는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혼자서도 편안하고 맛있게 느긋하게 커피와 빵을 먹기 위해서다.
크로와상 샌드위치에 샐러드가 곁들여진 브런치 세트가 아주 푸짐하고 마음에 들었다. 커피는 추가금액을 내고 라떼로 주문했다. 로스팅 기계실도 따로 있는 걸 보니 직접 로스팅해서 그런지 커피 맛이 아주 좋았다. 빵들도 다 맛있어 보였지만 딸을 위해 딸기로 만든 산타가 데코된 크림이 풍성한 몽블랑을 하나 샀다.
배부르게 브런치 세트를 먹고 책도 좀 읽으면서 딸 하교 시간에 맞춰 픽업할 수 있게 움직였다. 만족스러운 나들이였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여도 이렇게 혼자서 답사도 하고 근사한 카페도 들르면서 하루를 즐길 수 있다.
너무 답답하고 화나는 시국에 시원한 바다가 보고 싶어져서 조만간 대천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아이 등교시키고 바로 출발해서 다녀오면 또 반나절 일상 여행자의 시간을 보내고 올 수 있으리라.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다니는 나, 혼자인 시간을 충만하게 느낄 줄 아는 나, 주어진 상황에서 좋은 것을 찾아 내려는 내가 요즘 참 좋다. 일상에서 예술을 발견하고 일상을 여행하듯이 살 줄 아는 사람으로 계속 더 멋진 걸 발견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