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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 Jul 10. 2023

이혼은 안 했는데, 이혼 가정 구성원입니다.

부모님 이혼 후 10년이 흘렀다. 

브런치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들어오는 단어들이 요즘엔 '이혼'이다. 유튜브에 들어갔더니 '이혼'브이로그가 알고리즘으로 인해 메인 영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들 하던데 정말 10년이 흐르니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이혼했어요'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난, 이혼 가정 구성원으로 이제 10년 차가 되었다. 



며칠 째, 수정하기 - 저장 - 수정하기 - 저장을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털어놓지 않았던 나의 가정사를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공개적으로 적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서 용기를 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의 인생에서 제일 어둡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밖에 꺼내 놓아야 내가 이제 그 어둠 속에서 나올 거 같단 생각이 들어서요."라고 답 할 것 같다. 


20살이 되고, 신나는 대학생활을 즐기고 있던 어느 봄날, 친구 기숙사 방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따스한 날에 엄마는 덜컥 전화를 걸어와 "아빠랑 합의 이혼을 하기로 했어."라고 덤덤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뒤이어 "이제 너희 다 성인이니까 이해하지?"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는 지긋지긋한 부모의 부부싸움 때문에 이해한다고 대답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상황을 단번에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고, 후련할 줄 알았지만 마음 한 곳 어딘가 상처로 남아있었던 거 같다. 


부모님의 이혼 후 제일 싫었던 점을 뽑으라면 '등본 제출하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였다. 자취를 하기 전엔 등본을 떼면 가족관계가 고스란히 나왔는데 그때마다 아빠의 이름이 빠져있는 등본이 어딘가 모르게 나를 힘들게 했다. 분명 나는 엄마하고도 연락하고, 얼굴을 보며, 같이 살고, 아빠 하고도 연락하고 지내며 만나고 밥 먹고 하는데 알지도 못하는 빳빳한 등본은 이런 내 구구절절한 이야기까지 담아주지 않아 속상했다. 


그리고 힘들었던 건, 사람들과 명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제사는 지내는데 저랑 엄마는 시골에 가지 않아요. 아빠랑 친오빠만 시골에 가서 제사를 지내요."라고 대답하는데 대답하는 나도 뭔가 묘하게 이상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이 얘기를 듣는다면 단번에, 이혼했다는 걸 알아챘을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티 나지 않게 "그렇구나~"하고 넘어가 주신 분들에게 지금에라도 감사함을 전해본다. 



당시엔 너무나 힘들었는데, 10년이 지나고 유튜브에 '이혼했습니다'라는 영상들과 브런치에 들어오면 줄줄이 올라와있는 '이혼'키워드에 나도 모르게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부모님의 이혼에 상처만 남은 건 아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매일 시끄러웠던 집엔 드디어 웃음소리가 들렸으며, 나의 마음의 상처는 내가 스스로 꺼내보지 않으면 어느 정도 평소엔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갔으니 말이다. 


친오빠와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으며, 살면서 힘든 순간이 와도 어느 정도 시련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힘도 생겼다. (그렇다고 모든 시련이 다 견딜만한 건 아니다. 살아보니 나는 남들보다 유독 견딜만한 시련보다, 견디기 힘든 시련이 더 많이 찾아오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주변엔 하나, 둘 나에게 부모님의 이혼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럴 때마다 내가 외눈박이 토끼처럼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갔다. 오히려 "결혼해야지!"라는 잔소리에 "OO(엄마, 또는 아빠)처럼결혼하고 돌아올까?"라는 농담으로 결혼 잔소리에 방어를 하기도 했다. 


브런치 메인에 '이혼'이란 키워드가 눈에 자주 띄는 게 불편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브런치의 메인은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조금은 이해해 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에 마침표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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