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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강하 Feb 02. 2022

태양이었던 너에게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 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초등학교 친구들을 그대로 중학교에서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죠. 그러니 어릴 적 저의 인간관계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이혼을 하면서 저는 중학교 2학년 초반에 갑작스레 도시로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저에겐 모든 게 낯설었죠. 새로운 학교에서는 합창대회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이미 노래를 모두 알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따라가느라 부랴부랴 노래를 외워야 했습니다. 수업시간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고향에 남겨두고 온 친구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때 처음 향수병이 이런 거구나, 라는 걸 느꼈어요.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혼자 다니는 게 슬슬 익숙해질 때였습니다. 오락실을 참 좋아했는데요, 하굣길에 게임을 하다가 집에 가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오락실에서 격투 게임을 하는 도중 준이 처음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게임에 몰입하고 있는 저에게 어느새 다가온 준은 “우와, 너 진짜 잘한다!”라고 말하며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저는 누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웠어요. 그날 이후부터 준은 종종 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뭐 그리는 거야?”라면서 먼저 다가왔죠. 나중에 들은 말로는 뭔가를 계속 집중해서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대요. 뭘 하는지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다고 하더라고요. 저와 준은 급속도로 친해졌고, 등교부터 하교까지 하루 종일 붙어있게 됐어요. 심지어 집에 와서도 유선 전화를 붙들고 1~2시간씩 매일매일 전화 통화를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매일 할 말이 생겼는지 지금도 신기해요.


준은 저에게 헌신적일 정도로 다정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복도 청소 당번이었어요. 홀로 대걸레로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죠. 그런데 준이 저 멀리서 대걸레를 빨아서 들고 오는 게 아니겠어요? 우리는 나란히 걸레질을 하면서 어제 라디오에서 들었던 음악, 어제 읽은 만화책,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들을 나눴어요. 그 이후로 제가 걸레 당번일 때면 준은 당연하다는 듯 제 옆에서 같이 걸레질을 했습니다. 이 당시 저희 집은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용돈을 다른 친구들의 절반 정도만 받았어요. 그래서 매점에서 무언가를 사 먹는다는 게 저에게는 굉장한 사치였습니다. 그래서 매점에 거의 가본 적이 없었죠. 준은 그런 저를 매점에 데리고 가서 바나나 우유나 작은 캐러멜을 하나씩 손에 들려줬죠. 나중에는 오히려 제가 먼저 당당하게 “나 배고파, 빵 사줘” 이런 말을 할 지경이 됐어요. 그럴 때마다 준은 툴툴 대면서도 저를 매점에 데려가 줬고요.


고등학교 때 저는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낮에는 괜찮다가도 집에만 가면 우울감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았어요. 그래서 준에게 자주 징징거렸죠. "너무 외로워. 우울하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 준이 더 저를 신경 써준 것 같아요. 한때 게임에 빠져 준을 끌어들인 적이 있는데 함께 매일 새벽 3-4시까지 게임을 하다가 잠들었어요. 게임을 하지 않는 날에는 채팅을 했는데 계속 우울하다는 소리를 했어요. 그날도 그랬어요. “너무 우울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새벽 2시쯤이었는데 갑자기 준이 자기네 집으로 오라는 겁니다. 저는 한 번도 크게 일탈을 해본 적이 없어서 새벽에 밖에 나간다는 게 엄청나게 큰 일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준이 꼭 오라는 말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몰래 집을 빠져나갔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어요. 살금살금 문을 열고 계단도 최대한 조용히 내려와서는 준의 집까지 뛰어갔죠. 도착하니 준이 자신의 방에 DDR을 설치해놓고 절 기다리더라고요. 그러더니 게임을 틀고 저를 DDR 위로 밀어 넣었죠. 정신없이 게임을 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가더라고요. 돌아오는 길은 준과 함께였어요. 새까만 길을 걷던 준이 입을 열었어요. “나는 널 구원하려고 태어난 것 같아. 난 너의 태양이야.” 그때 제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저는 정말 준에게 구원을 받은 거였어요. 매일매일이 우울하고 슬펐던 10대 시절을 준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준의 태도가 조금씩 변했다고 느껴졌던 날이 있었어요. 제가 우울하다고 해도 제 말에 더 이상 경청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 날이요. 그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어요. 몇 년간 내 말을 다 들어주고 보듬어주던 친구가 변했다는 게요. 제가 어떻게 했는 줄 아세요? 다른 사람에게 징징거리기 시작했어요. 이제와 생각해보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네요. 그때는 그렇게 서운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너무 미안하고 또 고마웠어요. 그래서 이미 멀어져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았을 시점에 저는 갑자기 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때 정말 고마웠어.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너에게 이 마음을 직접 갚지는 못하겠지만 네가 나에게 줬던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갈게.


준의 반응은 크지 않았어요. 그래, 알겠다. 정도였어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소중한 거겠죠. 준과의 관계도 제 평생에 몇 년뿐이었지만 제 인생을 지탱해주었고 저를 만들어준 일부가 되었기에 그 순간은 영원히 제 안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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