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강하 Mar 19. 2023

마흔, 구린 어른이 되었다.

오래 사는 게 좋은 일은 아니네요.

분명 올 초까지만 해도 이제야 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한평생 스스로가 성숙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든 건 웬만한 일에 화가 안 나는 자신을 알아차린 후였다. 예전의 나는 감정이 자주 크게 요동치고, 불쾌한 일을 겪으면 표정으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화를 안 내다니. 아니, 화가 안 나다니. 이렇게 성숙해질 수가?!


그런데 며칠 전 이사를 위해 짐을 싸던 도중 '가치관 경매'라는 종이를 발견했다. 

대학 시절에 단체 상담 비슷한 특별 프로그램 세션 중에 하나였는데 여러 가치관 중에 각자 중요한 것을 한정된 금액 안에서 나누고 가장 높게 써낸 사람이 낙찰받는 형식이었다. 

대학생 시절 나는 '개인 전용의 완벽한 독서실(지식)', 편견 없는 세상(정의), 부정과 속임이 없는 세상(정직)을 낙찰받았다. (그 외의 가치관에는 결혼, 개인적 자율성, 우정, 정서적 안녕, 건강, 사랑 등이 있었다)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난 구린 어른이 됐다는 걸. 

지금의 내가 가치관 경매를 다시 한다면 '일생동안의 경제적 안정'을 1순위로 뽑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의 나는 돈과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어른을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경멸했다. 그런 어른들 때문에 세상이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됐구나.


물론 지금의 나는 변명하고 싶다. 나이 들어보니 젊은 시절 우울함의 원인은 궁핍이 원인이었다고. 

그러나 그때의 패기 넘치던 내가 그립기도 하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보수적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리고 가진 게 쥐뿔만큼 생긴 나는 쥐뿔 정도 보수적으로 변했다. 가진 게 더 많아지면 나는 더 구려질까? 


돈이 너무 없어서 커피 한 잔 사 먹는 것도 굉장히 큰 일이었던 시절 옥상달빛의 <없는 게 메리트> 가사를 들으며 웃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서글프다. '주머니 속의 용기를 꺼내보고 오늘도 웃는다.' 주머니 속에 용기 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용감했었네.


점점 더 구린 어른이 될지, 그나마 괜찮은 어른이 될지. 10년 뒤 다시 돌아봤을 때 지금의 나에게 20대의 나에게 얼마큼 덜 창피할지는 지금부터 어떻게 사느냐에 달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은 실패하기 위해 떠나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