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된다
선호하는 스타일의 여행 주제는 힐링. 그래서 오키나와, 카가와, 오카야마 등 붐비지 않는 곳만 다녔다. 사람이 적은 소도시는 깨끗하고 친절하지만 할 것이 없다. 선택지가 없으니 시간이 많이 남았고 그런 여유가 좋았다.
이번에 떠난 여행은 좀 더 계획이 있었다. 구루메에 도착해서 2박을 하고, 이후 우키하에서 1박, 마지막으로 후쿠오카에서 1박을 하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둘째 날은 환승을 3번이나 한 후 우레시노 온천역에서 도자기 헌팅을 하는 스케줄이 있었다.
나는 걱정이 많다. 버스를 잘못 타면 어쩌나. 환승을 제때 못하면 어쩌나. 여행 가방은 어디에 보관하지? 숙소 예약이 안 되어 있으면 어쩌나 등등. 실제로 우레시노에 가는 길에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환승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도스 역에서 내린 후 역 밖으로 나간 다음에 우레시노 온천까지 가는 티켓을 끊었어야 했는데 나가지 않아도 우레시노까지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기에 아무 생각없이 그 기차를 탔다. 역무원이 다가와서 티켓을 끊지 않은 걸 알고는 그 자리에서 현금 결제를 해줬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런 상황을 상상했을 때는 큰일이라고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별일이 아니었다. 그냥 역무원에게 돈을 더 내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역무원과 의사 소통에 꽤나 애를 먹었다)
우레시노 온천역에는 사람이 정말 없었다. 그래서 길에 택시도 없었다. 택시 앱도 깔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식사를 한 후 식당 종업원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우키하 역은 코인라커가 없었다. 그래서 역무원에게 얘기하여 커다란 트렁크 두 개를 몇 시간 동안 역 안에 맡겼다.
4박 5일 동안 일정이 부드럽게 원하는 대로 흘러간 건 별로 없었다. 숙소엔 소음도 있었고 놀랄 정도로 밥이 맛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떠났던 여행 중에서 이번에 제일 많은 걸 몸으로 배웠다. 편하기만 한 여행, 쉬고 맛있는 걸 먹고 즐기는 여행을 좋아했다. 하지만 진짜 여행이라는 건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고 그걸 해결해보는 경험을 하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 진짜 나에 대해 발견하고 조금 더 성장하게 되는 것. 뉴턴의 제1법칙에 따르면 정지한 물체는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이상 계속 멈춰있다. 그리고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물체 또한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영원히 같은 속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사람도 그렇다. 내가 처한 상황이 불합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변화가 두렵고 싫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 안주한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하다. 억지로 새로운 공간, 실패해도 괜찮은 상황에 나를 가져다 두고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주기 위해.
이번 여행이 의미있었던 이유 중 다른 하나는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극도로 강해서 도와달라는 말을 잘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상황을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렇게 도움을 받으면 그 고마움이 일상생활에서보다 훨씬 크게 다가온다. 낯선 타국에서 상대방은 자신에게 되돌아올 이득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선의로 도와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움을 받고 나면 나도 어디선가 이렇게 어려워하는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는 거구나!
물론 두 가지 깨달음을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책에도 비슷한 가르침을 주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글로 배워서 아는 것과 몸으로 체험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젊었을 때 배낭여행을 떠나라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지금 알게 된 걸 그때 알았다면 훨씬 더 일찍 나은 사람이 되었겠지.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