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대신 선택한 삶의 방식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시즌3, 1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의를 지키는 일에 환상이 있었다. 영화처럼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이 되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대부분의 사람은 어느 정도의 선함과 어느 정도의 악함이 뒤섞인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럴수록 정의라는 대의보다는 내 안위를 먼저 위하게 되었다.
때때로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허무할 때가 있다. 내 삶은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가 없어.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시즌3, 1화를 보고 오랫동안 여운에 잠겼다. 주인공 마이클 버넘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천년 후 미래에 떨어진다. 어쩌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미래에 도착한 버넘은 자신의 직책과 이름을 되뇌면서, 어째서 자기가 이곳에 왔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되새기려고 한다.
버넘이 낯선 행성에서 처음 만난 남자는 자기중심적이고 버넘을 배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그의 목적을 알게 된다. 우주에 흩어져 있는 멸종 위기 생물들을 환경이 잘 조성된 행성에 데려다주는 일이다.
1화의 첫 시작에는 평생 동안 부서진 스타플릿 사무실을 지키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사무실에서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올지도 모르는 스타플릿 관계자를 위해 자리를 지킨다. 이제는 이름만 남은 스타플릿은 그가 그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면 영영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1화에서 보여준 각기 다른 세 인물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자신이 믿는 신념 하나만으로 이어갔다는 것. 어쩌면 죽는 날까지 나의 존재를, 내가 한 일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 일을 이어가겠다는 마음은 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현실에도 종종 이런 사람들이 있다. 평생 남몰래 봉사를 이어가는 사람, 부당한 대우를 받을 걸 알면서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단체를 고발하는 사람, 아주 적은 돈으로 억울한 사람의 소송을 도와주는 변호사 등등.
내가 1화를 보면서 큰 감명을 받은 이유는 사실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시선 때문이 아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꿋꿋이 믿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의 인생에도 소명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것이 있다면 허무하게만 보이는 내 삶도 의미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하지만 어른이 된 나는 그런 거창한 건 다 싫어졌다. 물론 그렇게 사는 분들을 존경하고 존중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나는 겁이 많고,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그릇이 작은 인물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렇다고 평생 이익만 좇고 비겁하게 살겠다는 뜻도 아니다. 삶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선택의 기로가 펼쳐진다. 편의점 종업원에게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하는 일, 지하철 입구에 서있는 아주머니에게 전단지를 받는 일, 문을 여닫을 때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일. 이런 작은 일들도 모이면 결국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된다고 믿는다. 아니, 별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하는 일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니까. 아니, 뭐가 옳다고 믿는지도 상관없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다. 그럴 때마다 내 기분도 좋고, 상대방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끝나버릴 지구이지만 이 순간은 실재한다. 매 순간 나의 행동은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소명 대신 내가 선택한 나의 삶의 방식이다. 작은 일, 그리고 순간에 충실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