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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살 Jul 05. 2024

도심 한복판, 사람들이 죽었다.

시청참사로 온통 엉망이 된 나의 일상을 위해, 최진영 <단 한사람>


창 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로부터 달려오던 그 소리는 점차 커지며 적막을 가로지르고는 또 어렴풋하게 사라졌다. 나를 스쳐간 구급차의 소리. 어디를 향해 가는 길일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을 누군가? 멈추지 않는 피나 멈춰 버린 심장으로 애타게 기다릴 누군가? 지금껏 일궈놓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릴 불길? 어쩌면 다행히도 길에 취해 잠들었을 취객 나부랭이? 아니면 이미 죽음이, 불길이, 영원한 잠이 삼켜버린 누군가를 싣고 병원으로 급히 향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근처에 소방서가 있는 까닭에 가끔씩 집 앞으로 지나가는 사이렌 소리를 여러 차례 들어왔음에도 그 잔음이 쉬이 가시지 않는 까닭은 오늘 그 사이렌이 울려 퍼졌을 '시청' 앞 거리가 끝없이 맴도는 까닭이었다. 각기 다른 주기로 울려댔을 수십개의 사이렌 소리가 모여 들었을 그 거리가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거리, 그래 그 거리는. 너무나 익숙한 도심 한복판의 거리였다. 


한때 나의 일터였던 곳, 그래서 매일 밥을 먹으러 커피를 마시러 수도 없이 걸어 다녔던 곳,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걸어봤을 그 일상이던 공간이 끔찍한 사고의 현장이 되었단다. 아무리 죽음은 갑자기, 느닷없이, 어디서든 닥쳐올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거리로 닥쳐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랜 기간 동안 지켜봐 왔었다. '결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라는 것은 없음은. 어떤 가정을 해도 결국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바다 한 가운데서 배가 침몰했고, 길 한 가운데 사람들의 무게가 삶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며 따져 물었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生과 死가 나뉘는가? 하필이면 그 때 그 장소에, 바로 그 곳에 서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고 하마터면 그 때 그 장소에, 바로 그 곳에 있을 뻔 했던 사람이 거기 있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또 무엇일까? 누구를 붙잡고 물어야 하며 억울함을 토로해야 할까?


요 며칠 나의 일상은 이 허망한 사고로 얼룩졌다. 차를 몰고 가는 중에도 이 차가 갑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쩌나. 나의 눈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돌진하면 어쩌나. 걷고 있는 순간에는 곁을 지나치는 모든 자동차들이 잠재적인 위험으로만 여겨졌다. 언제든 삶을 앗아갈 수 있는 수단, 그 검고 무섭고 강력한 존재. 



 



온통 엉망이 된 중에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최진영의 소설 <단 한 사람>이다. 그 어떤 정보도 없이 읽기 시작한 글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펑펑 울었다. 내가 던졌던 질문들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신에게는 뜻이 있는가? 사람은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 


현실의 일은 아직도 실감이 안나서, 실제 피해자들과 유족과는 한 발 떨어져 있는 내가 감히 상상도 못할 슬픔이니까. 같잖은 마음으로 슬퍼해서는 안된다는 자기검열 때문에 '시청 사건'을 보며 차마 울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책이니까, 책을 읽으면서 우는 거니까 울어도 될 것 같았다. 





최진영의 소설 <단 한 사람>에는 '단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은 주인공 '목화'가 등장한다. 그 능력은 3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꿈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는 가운데 '나무의 목소리'는 그 중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도록 명령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지는 단 한 사람에 대한 기준은 없다. 주인공의 의지와 능력이 개입할 틈도 없다. 


(사실, 이 소설은 이 설정을 제외하고라도 프롤로그부터 독특한 등장인물들의 이름, 중간에 주인공이 사랑을 하고 이별하는 과정 등등 담고 있는 내용, 흐름이 너무 좋은 소설이라 추천하지만 여기서는 이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설정에만 주목해 봤다)



p. 140
잠들자마자 죽음이 보였다. 곳곳이 불탔다. 연기가 자욱했다. 숨이 막혔다. 목화는 내내 어린아이만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의식을 잃은 그 아이를 목화는 간절히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목화의 의지는 소용없었다. 나무의 선택만이 중요했다. 수많은 장면이 소거되고 목화에게 단 한 사람이 보였다. 무화는 무력감에 빠졌다.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 아이가 아닌지. 어째서 배가 침몰하던 그때 나를 부르지 않았는지. 나뿐 아니라 엄마도, 할머니도 부르지 않았는지. 당신의 기준은 대체 무엇인지. 물론 목화는 알고 있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자신과 엄마와 할머니를 불렀다면 적어도 세 명은 더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중개에서 깨어난 뒤 목화는 뉴스를 찾아봤다. 그날의 화재로 다섯 명이 사망했고 두 명이 위중한 상태라고 했다. 희생자는 아이 두 명, 노인 두 명, 소방관 한 명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구조된 남자가 방화범으로 지목되었다.

목화는 바로 그 남자를 구했다. 탈진할 만큼 힘을 들여 남자 주변의 불씨를 껐다. 소방관이 구조할 때까지 남자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



언제나처럼 죽어가는 여러 사람 가운데 주인공은 나무 명령대로 단 한 사람만을 살렸는데, 그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방화범이었던 것이었다. 책에는 여러 가지 죽음 상황이 그려졌지만 특히 위 페이지를 읽다가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목화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가장 크게 반발하며 힘들어했다.  왜 타인의 삶을,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한없이 가볍게 여기는 자는 죽음으로 도달하지 않았고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 사람들은 죽고 말았을까. 왜 그들이 죽어야 했을까. 


시청 역주행 참사가 유난히 가슴이 아픈 이유, 가장 분노했던 지점은 여기에 있었다.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야근, 승진 축하, 회식 후 일터로 복귀 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이유로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있게 한 당사자는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 살아 마땅한 사람은 죽어가는데, 나의 온 힘을 다해 살려야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죽음의 원인이 된 사람이라는 점.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살리는 힘이 있다니, 마치 '세상에 삶이 마땅한 사람은 없다', '죽음과 삶이 갈리는 데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끼어들 수 없다' 라고 단언하는 것만 같은 운명. 소설 속 그 '어쩔 수 없음'에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를 스쳐갔던 수많은 사이렌 소리들에게

한 때 일했던 병원 홍보팀 사무실은 장례식장 건물 5층에 있었다. 장례식장은 지하에 있었지만 건물 자체에 '장례식장'이라는 아주 큰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장례식장 안내판을 지나쳐야 했다. 큰 전광판에는 환한 빛이 어제 혹은 오늘 죽음을 맞이한 이의 이름과 장례식장 번호를 빼곡히 안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쾌한 아침 출근길마다 누군가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었다. 지인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발견하거나 이름 옆에 있는 괄호 안의 숫자가 유난히 작은 날은 더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곧 익숙해졌다. 그 전광판은 점심 메뉴를 고민하며 종종거리며 나가는 발걸음 뒤에 있었고,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는 날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건물 1층에는 스타벅스, 세계 최고의 녹색 카페가 위치해 있었다. 의사들이, 간호사들이, 환자의 보호자들이, 상복을 입은 사람과 방금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인사를 했을 이들이 줄을 서서 커피를 기다렸다. 죽음을 밟고 서서 따스한 커피를 들이키며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누군가의 죽음이 일상에 밀리고, 살아있는 자들의 시시콜콜한 대화와, 배를 채우기 위한 고민을 실은 발걸음 뒤로 스러지는 것에 서서히 익숙해진 것이다.



건물 옆은 응급실이었다. 퇴근하고 출근할 때마다 들었던 수많은 사이렌 소리가 이제서야 생각난다. 나의 생을 걸고 있는 일터 옆으로 그토록 수많은 죽음이 오고갔다. 그 사이에서 나는 결국 무뎌졌었다.  그렇게 이번 사건도 무뎌질까. 온 국민이 시시각각 새롭게 죽음의 모든 면면을 속속들이 알게 되겠지만, 결국은 뉴스를 끄면 자신의 삶으로 나아가듯, 그렇게 되겠지. 내일이 찾아오고 그래서 그 날은 어제가 되고, 지난 달이 되고, 지난 해가 되고, 몇 년 전이 되어 비슷한 사건이 발생해야만 역사 속에서 꺼내지는 비교대상이 되겠지. 그렇게 죽음은 잊혀지겠지. 아주 잠깐 이 곳에 존재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 정도로만 남겠지. 


그런데 정말. 그렇게 잊어도 될까? 나를 스쳐지나가는 사이렌 소리를 잊었던 것처럼, 그냥 잊고 나면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나의 죽음은 언제 올까? 오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기에 '언제'올 것인지만 모르는 것이지 올 것임은 분명한데, 적어도 '잊지 않아야' '무뎌지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책 속에 목화가 바랬던 죽음처럼.

p. 238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원하는 죽음.
신목화도 매일 준비하고 싶었다. 멀리서 죽음의 실루엣이 보이고 차차 선명해질 떄, 당황하지 않고 의젓하게 그를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 깊이 그리워한 친구를 만난 듯 진심 어린 포옹을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 육신에 편안한 표정을 남길 수 있겠지.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 또한 많이 목격했다. 목화는 그들의 마지막을 기억했으며 그와 같은 죽음을 원했다. 그러므로 남김없이 슬퍼할 것이다. 마음껏 그리워할 것이다. 사소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후회없이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목화가 원하는 삶.






상실을 극복한다, 슬픔을 덮는다, 위로를 건넨다. 

그 어떤 의도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고, 마침 읽은 책이 나의 질문을, 외침을 대변하는 것 같아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을 덧붙인다.


 10여 년간 붙들고 지낸 여러 질문이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쓴 문장과 단어가 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겨우 질문을 이해했을 뿐입니다. 내가 계속 묻던 것은 알고 싶지 않은 것이었어요. 


다른질문, 그것이 가능할까요. 가까스로 사람에 불과한 내가. 글을 쓸수록 강렬하게 인지합니다.

한 번뿐인 삶. 다시없을 오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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