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신문사, 무가지, IT회사, 대형병원 사보, 잡지, 화장품회사 블로그, 각종 공기업과 공사의 블로그 등등...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글을 써서 보내고 돈을 받아 본 곳이다. 인턴으로서, 사원으로서, 블로거로서, 프리랜서로서,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번역가로서... 글을 썼다. 이렇게 적고 나니 참으로 다양하다 싶다. 좋은 말로 해서 다양이지, 어느 하나 전문지식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하고 빈약한 '글빨'에 기대 비루하게 연명해 온 삶인 셈이다.
앞으로 써 내려갈 글들은 절대로 글을 잘 쓰기 위한 비법에 관한 것은 아니다. 눈만 돌리면 각종 책들이 있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널렸는데,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줄 만큼 나의 글에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근 15년간 글을 써서 돈을 벌어왔던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태가 될 것 같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도 '끕'이 있다. 글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수년간의 자료 조사를 마쳐 몇 백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책을 내기까지 출판사가 기다려 주는 작가는 얼마 없다. 그런 작가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도 알고, 당신도 아는 그런 몇 안 되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기자, 작가, 콘텐츠 크리에이터, 시인, 카피라이터, 인터뷰어, 에디터,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은 여전히 많다. 요즘은 영상시대, 메타버스의 시대라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기초가 되는 것은 역시 글이다.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삶도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너는 일기를 참 잘 쓰는구나, 시작은 그렇게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의 시작은 대개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초등학교 시절 매일같이 숙제로 써간 일기를 칭찬받은 기억, 학급 친구들 앞에서 선생님께서 '일기는 이렇게 써야 해요'라며 읽어주던 순간의 쑥스러움, 그리고 부끄러움을 넘어서던 황홀함. 그렇게 일기는 매일의 기억과 일과를 기록한다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짓기'가 되어 버렸다. 심혈을 기울여 쓴 문장에 빨간색 밑줄이 그어지고, 그 아래 남겨진 격려와 칭찬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선생님은 모든 선생님이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어린 초등학생에게 '이 재능을 살려 무엇이든 될 것'이라며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다. 나는 일기를 잘 쓰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일기처럼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발견해 준 일기 잘 쓰는 재능 외에는 별다른 재능도, 주목받을 가능성도 발견하지 못한 채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선택한 전공은 신문방송학과였다. 그러나 대학시절 글쓰기 수업에서 받은 학점은 고작 C였다. 기자를 해보리라 꿈을 막 움트려던 신문방송학과 1학년 때의 일이었다. 서로 돌아가며 글을 읽고 합평하고, 상대적으로 A, B, C를 매겨 돌려주는 답안지 앞에서 나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품어왔던 기자라는 꿈은 기어들어갔고, 그 자리를 채울만한 그렇고 그런 취업자리를 알아보게 됐다. 그러나 저주받은 문과, 그것도 현실에 아무 짝에 쓸모없는 신문방송학과 전공을 가지고 덤벼 볼 회사의 직무란 것은 홍보 밖에는 없었다.
홍보팀, 글만 쓰는 곳은 아니다
대학교 3학년, IT회사 홍보팀 인턴으로 들어갔다. 첫 사회생활이었다. 앞에 붙은 회사 이름이 자랑스러워서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 이것 좀 보라고, 나는 곧 이렇게 누구나 아는 회사에서 글을 쓰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첫 사회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이 IT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이해하고 보도자료를 만들어 내는 일. 그 어려운 것을 중학교 2학년 수준의 독자가 읽고도 옳다구나! 하고 알아챌 정도로 쉽게, 그러나 멋들어져 보이게 문자화해야 했다. A4 한 장을 채우기 위해 수백 장을 읽고 이해해야 했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또 글로 적어야 했다. 글은 역시 아무나 쓰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홍보팀은 글만 쓰는 곳은 아니었다. 끝내주는 경력의 직원들과 기자들 사이에서 김치찌개에 소주를 곁들이는 자리를 함께 했다. 점심시간이었다. 빈약한 정보와 소심한 성격 탓에 입 한 번 제대로 떼지 못했다. 사무실에 앉아서 타자를 쳐 대는 것 외에도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홍보팀은 나의 적성이 아니라고, 글을 쓰는 일은 좋아하지만 다른 일을 찾겠노라고 하고 인턴 연장의 기회를 거절하고 쉼을 갖겠다며 휴학을 했다. 그러나 휴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전쟁의 반열에 이른 '취업 시장'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아무 곳이나 돈벌이를 찾고 싶었다. 한 번 시작된 직무는 그다음으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잠시 다른 팀에서도 근무해 봤지만 결혼 후, 안정적이고 탄탄하다는 직장을 얻기 위해 대학병원에 지원할 때도 나의 선택지는 '홍보팀'이었다. 한 문항 당 엄청난 글짓기를 요구하는 '자소설'쓰기에 돌입했다. 각종 미사여구와 뻥튀기와 부풀리기로 자소설을 써서 들어간 곳은 역시나 글을 써야 하는 곳이었다.
자기소개서의 특기란에 '글쓰기'를 적는다고?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쓸 때.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니, 그때만 해도 촌스럽게도 취미와 특기를 쓰는 난이 있었다. 입사원서를 쓸 때의 불문율, 현장에서 시킬 수 없는 것을 취미와 특기로 적어야 했다. 예컨대 수영이나 농구 같은. 그러나 그 진위는 믿을 수 없다. 20명 되는 동기 중, 가장 지탄받고, 인기 없고, 낯을 가리던 한 동기는 특기에 '친구 사귀기'라고 썼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택한 특기는 또다시 '글쓰기'였다. 그리고 입사 후 상무님과의 첫 미팅자리. 이력서를 이리저리 살피던 끝에 내게 던진 말은 저것이 전부였다.
"특기가 글쓰기?"
"어디 글 한 번 써 봐."
까마득한 상무가 내린 지시, 그 이후로 나는 회사 서비스의 브로셔에 들어갈 카피를 적어야 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타국 땅의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본 적조차 없는 제품에 대해 그럴듯한 단어들을 붙여 넣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다. 직접 경험해 본 사람들이 적어 놓은 글들을 참고해 단어를 그럴싸하게 바꾸고, 어순을 뒤집어 완성본으로 내놓는 일이 나의 글쓰기의 전부가 되었다.
글 한 편에 3000원 드립니다
졸업, 취직 그다음은 결혼과 출산이었다. 줄줄이 달린 소시지처럼 세 명의 아이를 낳고 나의 시간이란 사라졌다. 어디로 나갈 수 있는 시간도 기력도 없었다. 그러나 달린 소시지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졌고 다시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온갖 분야의 '프리랜서 작가'에 지원했다. 이력서를 들이밀어 일거리를 잡을 수 있는 곳에는 어떻게든 밀고 들어가 글을 적었다.
하얀 종이, 반짝이는 커서를 앞에 두고 손가락을 두드리면 아무것도 없던 백지에 까만 글자가 들어찼다. 無에서 有를 만드는 것, 요리도, 노래도, 그림도, 체육도 어떤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없었던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 무언가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것이 돈이 된다. 가치를 지닌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기만족을 하며 글쓰기는 돈벌이로 전락했다. 시간과 노력을 갈아 넣은 결과물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돈'이 생기니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블로그, 작은 잡지, 신문사 등에 글을 썼다. 그러나 프리랜서의 세계는 더욱 냉혹했다. 멀쩡했던 대표님이 한두 달 원고료를 미루기 시작했고, 전화기 너머로 언성을 높이며 내 돈을 요구해야 했다. 하루 종일 써서 보낸 글이 아예 게재되지 않기도 했고, 기껏 적어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글도 있었다.
매일같이 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프리랜서 작가', '프리랜서 기자'를 검색했다. 대부분이 블로그 포스팅 작가를 모집하는 글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 또한구직 사이트에서 건당 3,000원짜리 포스팅을 해 줄 프리랜서 작가를 찾는다는 곳에서 제안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3000원? 순간 눈을 의심했다. 건당 10,000원을 적어놓고 업계 최고 대우라고 내세우고 있던 것이 헛된 말은 아니구나. 글 한 편에 벌 수 있는 돈이 3천 원으로 하락해 버린 지금, 나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인정받고 싶었고, 그 답은 다시 '글'에 있었다. 쓸 수 있는 글을 써 내려가야 했다. 당장 돈을 가져다주지는 않아도 그래도 사람들이 보아주는 글이 나았다. 3천 원에 어디로 팔려가는지 모를 블로그 포스팅을 적을 바에는, 1원도 주지 않더라도 나의 글을 쓰고 싶었다.
'글이나 써봐'라는 말에 불끈하는 이유는
'글이나 써봐'.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10년째 이 말을 가끔씩 뱉는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 김지영이 재취업을 포기하고 자아실현을 이뤄 낸 수단 역시 글이었다. 평범한 월급쟁이가 한 달에 23억을 버는 재테크의 달인이 되었다는 자랑을 접하게 된 것 역시 '글'이었고 90년생은 90년생 대로 나이 쉰이면 쉰 인대로 '90년생이 온다', '서른다섯, 늙는 기분', '쉰이 되었다'며 글을 적고 책으로 엮었다. 누구나 다,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것만 같은 세상이었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섣불리 글을 쓸 수 없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너무 많으니까. 잘 쓴 글은 여기저기에 넘쳐나니까. 가뜩이나 비교와 자기 비하가 특징인 나는 갈수록 글쓰기가 어려워졌다. 매일 태어나는 새로운 문장, 참신한 표현, 마음에 와닿는 다른 이들의 생각을 나는 왜 먼저 하지 못했을까, 글로 표현하지 못할까? 후회만 하게 됐다. 그러나 이제는 쓰고 싶었다. 나의 글들을.
내가 글을 쓰려는 이유
사실 내 일상은 그다지 특별하지도 못하다. 소소하고 자잘한 일상의 반복이었으며 굳이 따지자면 성공보다는 실패가, 아니 실패라고 일컫기도 뭐 한 자잘한 좌절이 있었을 뿐이다. 성취와 환희보다는 그냥 그런대로 유지되는 삶을 향한 안도나 한숨에 가깝기도 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힘들다고, 실패했다고, 혹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마저 이야깃거리가 되는 곳이 브런치였고, 그 사람들의 삶이 빛나는 곳은 글 속이었다.
이제는 열등감과 질투심, 시기, 자존감, 우월감. 무엇이든 동력 삼아 나를 채근해 '글'을 써보려고 한다. 저런 인간도 쓰는데 너는 왜 하지 못하냐는 자기 비하나 '이 글보다는 잘 쓰지 않겠냐'는 나를 향한 과대평가, 그것도 아니라면 예상외의 큰 성공으로 누리게 될 핑크빛 상상 회로. 그 무엇이 되었든 그 감정에 집중해 글을 써 내려가야겠다.
사실 지금 브런치 작가의 서랍 안에는 여러 편의 글이 쌓여있다. 퇴고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아직 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서, 글의 짜임새를 갖추지 못해서, 발행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매번 '저장'만 눌러 보관해 둔 글이다. 제대로 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누르고 간 하트 하나에, 조회수에 의미를 부여하느라 발행도 하지 못했다. 꼭 그 숫자만큼 내 글이 좋은 글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쓰려다 쓰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쓰이지 못한 이야기들은 어디에도 남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어쨌거나 써진 글은 다시 돌아가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오늘 내가 글을 발행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