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엔 집에 있는 게 최고야!
어렸을 때 나는 눈 맞는 것이 참 좋았더랬다.
눈 오는 날이 정말 싫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무더운 나라에서 자란 나는 추위를 많이 타면서도 겨울을 참 좋아했는데 그런 나도 눈을 싫어하게 만든 것이 있다면 바로 디아이싱이다.
눈이 오는 날이면 출근길부터 두려워지던 디아이싱(de-icing), 바로 항공기 위에 쌓인 눈이나 얼음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항공기의 안전한 운항을 위하여 꼭 필요한 작업이란 것을 알면서도 비행할 때는 왜 이리도 원망스럽던지..
디아이싱을 해야 한다는 안내 방송이 기내에 나오는 순간, 사람들의 야유소리와 함께 불평, 불만 소리가 웅성웅성 들려온다. 그럼 그 시점부터는 승무원은 승객 가시권 내에 있으면서 승객이 원하는 정보(예를 들면 소요시간)를 전달해야 하는데, "얼마나 걸려요?"나 "그래서 언제 출발하는데요?"는 매우 정중한 편에 속한다. 본인의 일정을 일일이 나열하며 당장 출발시키라고 하거나 화를 내며 내리겠다는 손님도 부지기수다. 정해진 룰에 따라 음료나 스낵 또는 식사가 제공되지만 그것으로 손님들의 마음이 풀릴 일은 드물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겨울, 내가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던 날의 일이다. 눈보라가 심하게 치는 어느 날이었는데 비행기 안에서만 3시간을 있었더랬다. 심지어 같이 가기로 한 친구는 우리보다 1시간 뒤 디파쳐인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그 친구가 우리보다 30분을 제주도에 먼저 도착하기까지 했다. 그 친구가 우리 비행기보다 먼저 도착한 이유는 우리가 디아이싱을 두 번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디아이싱을 진행하니(디아이싱 패드에 가고, 순번대로 디아이싱을 진행하고 다시 활주로로 돌아옴) 이미 한 시간 가량이 지나있었는데, 그때 하기하겠다는 손님들이 떼로 일어섰다. 하지만 그 손님들이 다시 내리면 그들의 짐도 함께 하기해야 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기내의 보안 체크를 다시 해야 할 수도 있고(왜냐하면 만약 내리겠다는 손님이 폭발물을 기내에 놓고 자신만 탈출하는 상황일 수도 있으니까) 그럼 또 출발 시간 지연이 발생되니 승무원들이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보였다.
다른 손님들은 왜 내리냐며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니 이해가 되는 것이 손님 중 한 분이 변호사인데 본인의 재판이 제주도 도착 후 1시간 내에 예정되어 있었고 본인은 재판만 끝나면 바로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미 재판 시간에는 맞출 수 없으니 제주도에 갈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승무원 수는 한정되어 있고 일어서서 따지는 손님들 수는 계속 늘어나고... 나는 손님으로 비행기에 탑승한 입장이니 승무원들이 안쓰러운 마음에 그냥 가만히 자리에 앉아 눈만 감고 있었다.
결국 우리 비행기는 탑승동으로 돌아갔고 약 50여 명의 손님이 내린 후, 다시 디아이싱 패드로 이동한 뒤(그 사이 눈이 또 쌓였다) 디아이싱을 진행하고 출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다시 나오는 안내방송 "저희 비행기는 출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또다시 눈이 쌓여..." 사람들이 허탈하게 웃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한 지 4시간이 지나서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몇 년 전 일인데도 참 또렷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다. 결혼 후 저녁 비행이 있던 날, 아침에 해장국집에 가서 순대국밥을 먹는데 눈이 펑펑 오는 걸 보고 비행 가기 싫어 운 적도 있다. 물론 비행을 그만 둔 지금도 겨울에 남편이 비행이 있는 날이면 눈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옛 말에 어른들 말씀 틀린 게 없다는데 비나 눈이 오는 날에 약속을 잡아서 나가는 날이면 이런 날은 집에 있는 게 최고라 했다. 요즘 눈이 오면 남편과 함께 밖에 나가 눈을 잠시 맞고 조그마한 케이크를 사 와 초를 부는 것이 우리 부부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올 겨울, 그때쯤이면 모두가 마스크 없이, 아무 걱정 없이 눈 오는 날을 맞이 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