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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훈실 Jan 18. 2024

기쁨의 내구연한

   

새해의 다짐 하나가 있다. 기쁨을 최대한 오래 가져가는 것이다. 아이스바를 아껴 먹다 다 녹아 흘러내려 옷만 망쳤던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일까. 기쁨이나 행복같이 플러스가 붙는 감정은 빨리, 속사포로 맛보는 게 최고라는 생각을 했다.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발을 동동 구르는 마음이 기쁨을 앞에 둔 정서였다.



하지만 허겁지겁 먹는 밥이 왠지 슬픈 것처럼 기쁨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밥이 가지고 있는 맛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하고 그저 삼키는데 급급하다면 밥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밥알에 스며있는 5월의 푸르름과 한여름의 땡볕, 늦가을 소슬바람의 바싹 마른 향기를 느껴보아야 한다. 기쁨이라고 다를까. 과정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느낌과 생각을 소거한 채 푸석한 결말이라도 그럴듯하면 기뻐한다. 그렇게 누린 기쁨은 맛있는 토핑이나 향신료의 오묘한 맛을 놓치는 식사와 다를 바 없다. 점점 기쁨의 역치만 높아지고 작은 기쁨에는 무감각해지는 모래알 멘탈로 시나브로 변한다. 



그렇다면 기쁨을 최대한 오래 가져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언젠가 행복이나 기쁨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글을 읽었다. 숨 넘어 갈듯한 행복도 좋지만 살다 보면 그런 행복은 가뭄에 콩 나는 정도다. 반대로 너무 사소해서 기쁨이라고 인식조차 못 하는 자잘한 기쁨은 차고 넘친다. 단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콘크리트빛 인식이 있을 뿐이다. 올해는 자잘한 기쁨을 잇대고 잇대서 기쁨을 누리는 순간을 길게 가져가고 싶다.


고진하 시인은 ‘흔한 것이 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TV다큐멘터리에서 풀 우거진 자기 집을 소개하며 도처에 귀한 풀들이 넘쳐난다고 자랑했다. 남들은 잡초라고 비하하는 야생초를 귀하게 여기며 찬거리로 쓰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고진하의 풀처럼 작고 사소하고 흔한 기쁨을 찾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 


돌아보면 내게도 작은 기쁨이 많았다. 성대결절로 목소리가 안 나오다 어느날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술술 나오던 순간, 다 죽은 줄 알았던 녹보수가 활개치듯 일어서던 아침의 환희, 아침마다 홀짝거리는 카페라떼의 감미로운 향기가 나를 기쁘게 한다. 


기쁨의 내구연한은 쓰기에 달렸다. 그보다 먼저 자잘한 기쁨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을 장착해야 할 것이다. 기쁜 사람들의 사회가 곧 착한 사람들의 사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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