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주 정도 레시피만 외워서 본 첫 조주기능사 실기결과가 나왔다. 사실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크게 하진 않았지만 혹시나 떨어지더라도 다시 보진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그래도 붙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다시 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데는 실기시험을 직접 보면서 느낀 점들이 크게 작용했다. 현장에서 과연 이 자격증이 실효성이 있을까 굉장히 많은 의문점을 주었는데 그 생생한 후기를 전해볼까 한다.
참고로 현재는 캐쥬얼바를 운영중이고, 대학생 때는 국내외에서 1년 정도 바텐더로 근무했었다.
필기시험 후기
실기를 보기 앞서 필기시험은 작년 겨울에 합격했다. 조주기능사가 이미 현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필요없는 자격증임은 알고 있었지만 추후에 기업강의를 비롯해 자격증의 유무가 혹시라도 필요한 곳이 있을까 싶어 시간날 때 취득만 해두려고 시작한 공부였다.
필기는 문제은행식이라서 시험문제집 1권 정도만 구비해서 문제만 여러번 풀어보면 어렵지 않게 취득할 수 있다. 특히 이미 각종 술의 역사적 배경이나 맛과 향에 대해 지식이 있는 상태라면 정말 쉽게 합격할 수 있다. (관련 서적들을 호기심으로 읽어봤거나 이미 칵테일이나 위스키, 와인에 관심이 많다면 정말 어렵지 않은 시험이다)
시험공부 전에 추천할만한 책은 다음과 같다. 시험 자체가 개론에 가깝기 때문에 위스키, 럼, 진, 보드카, 데낄라, 와인에 대한 기본적인 원료와 주요 산지, 대표브랜드 정도만 이미 안다는 전제면, 정말 하루이틀 준비로 충분한 시험이다.
이 정도만 읽어봐도 시험공부는 필요없을 정도...
다만, 각종 술의 역사나 지역별 특징들을 간략하게 알 수 있어서 아예 이쪽 분야에 지식이 없다면 필기시험을 통해 기본적인 소양을 얻을 수 있다. 칵테일이나 위스키에 관심이 있어 그 관심을 피력하고자 한다면 도전해볼하다. (물론 술 하나하나 그 역사나 제조방법, 유명산지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기 때문에 이 정도가 처음시작하는 분들에게 적당한 듯 하다)
실기시험 후기
실기시험은 본시험 접수일자를 놓쳐서 추가접수 기간에 접수하는 바람에 가장 가까운 곳이 창원에 위치한 시험장이었다. 참고로 창원에 있는 창신대학교 5호관은 '사회관' 건물이며 주차는 건물 주변에 하거나 건물 내 지하주차장으로 가면 된다.
실기시험 대기장소에는 총 9명 정도 있었는데 들어가기 전에 랜덤번호를 뽑아 입장순서를 정한다. 한 타임에 3명씩 약 15분간 시험을 치루는데, 5번을 뽑아서 두번째 조로 시험을 치뤘다. 시험입장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 등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시험입장에서부터 이 조주기능사의 실기시험의 실효성에 의문이 드는 부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첫번째. 준비물 - 위생타월
분명 수험표 하단에는 수험자지참준비물로 위생타월을 지참하라고 나와있다. 물론 사전에 타월을 꼭 지참해야 하는지 확인하지 않은 내 탓도 있지만 막상 시험장에 준비물을 들고 들어가려하니, 타월을 놔두고 들어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감독관에게 준비물로 위생타월이 있던데 필요하지 않냐고 반문했으나 그냥 놔두고 들어가라고만 계속 말해서 놓고 들어갔다. 하지만 실제 시험장 내에는 별도의 위생타월이 비치되어 있지 않았으며, 위생타월 사용여부와 같은 위생사항을 크게 체크하지도 않는 듯 했다. 이럴거였으면 굳이 왜 준비물에 기재를 해두었으며, 위생사항을 체크하겠다는 말은 그냥 아무 의미도 없이 뱉은 것인지 의아했다.
필요없는 준비물이라면 수험표에 나오지 않게 고쳐야하며, 만일 확인사항에는 있지만 구비가 필요없다면 시험장에서 구비하기 때문에 지참할 필요는 없다고 고지를 해야했다.
두번째. 위생사항 (가장 당황했던 부분)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분명 시험시작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점을 감독관들은 강조했다. 그런데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보니 손을 씻을 수 있는 싱크대나 심지어는 타월 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거의 바로 시험준비가 시작되어 물어볼 겨를 도 놓친 채 시험이 시작되었고, 손을 닦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시험을 치뤘다. 앞서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다시 볼 생각이 없었다고 생각한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위생을 신경쓰라고 해놓고 위생을 신경쓸 수 있는 시설물이나 조치를 전혀 취해두지 않고 도대체 어떤 부분을 평가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 시험에 앞서 위생적인 장치들이 구비되어 있지 않으니, 해당 부분을 고려하라는 안내라도 했다면 업장과 동일한 환경을 만들 수 없는 시험장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할 여지라도 있었을 듯 싶다.
세번째. 열악한 바 기물들과 술 종류
시험 시작하기 전 감독관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얼핏 들려왔다.
- 무슨 술이 없고, 무슨 술이 없는데 어떻게 하냐.
- 그럼 그거 들어가는 건 빼고 보면 되니까 크게 신경쓸 부분은 아니다.
위 내용이 듣고 생각해보면, 하기와 같은 술들은 관리가 안되서 시험장에 없는 듯 했다.
얼핏 조금 가격대가 나가고 (일반적으로 전통주나 고가 브랜드 제품)
재고 보유가 어렵거나 (쇼트가 났거나)
장기 보관이 어려운 종류 (도수가 낮아 실온에서 오랫동안 놓아두기 어려운 리큐르 종류)
국가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시험이 이렇게 허술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도 했는데 이 뿐만이 아니었다. 실제 시험장에 들어가보니 지거라든지 바스푼은 시중에서 파는 것중에서도 가장 저렴한 라인업이었고 심지어 지거는 눈금자가 별도로 표시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계량이 불가능했다.
특히 지거 용량이 명확하지 않아 시험장 들어가자마자 지거의 용량에 대해 물어봤는데 위아래 용량이 누가봐도 달랐는데 똑같다며 크게 신경쓰지 말라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 조주기능사 실기시험에서는 7분동안 3가지 칵테일을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데, 들어가는 각종 술들의 용량과 가니쉬, 사용하는 컵, 조주방법을 평가해야 한다. 특히 용량이 달라지면 맛도 달라지기 때문에 현업에서는 일정한 맛을 내기 위해 심지어 어떤 업장에서는 gram으로까지 용량을 맞추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용량을 무시한 채 조주를 하라하니 굉장히 황당했다.
심지어 출제기준에도 표준레시피에 따라 조주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확인사항!) 출처: Q-net 조주기능사 출제기준
물론 현업에서 사용하는 레시피는 업장마다 선호하는 맛과 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IBA공식 레시피가 있긴 하지만 레시피는 어디까지나 레시피일 뿐 업장의 취향에 맞게 얼마든지 변경하고, 사용하는 술을 추가한다거나 시럽을 바꾼다거나 하는 등 다양한 맛을 시도하고 바꾼다. 그래서 용량이 현업에 와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레시피가 맞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시험장에서 그 용량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부분이 당황스러웠다. 실제 시험볼 때 용량에 신경쓸 필요가 없어 들어가는 술만 맞으면 된다는 부분은 되려 편한 부분이긴 했지만 이렇게 대충대충 보는 시험이라면 정말 의미가 없는 시험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다.
네번째. 짧은 시험시간
조주기능사 실기시험에서는 7분동안 3개의 칵테일을 조주해서 제출해야 한다. 시험에서는 다음과 같이 3가지가 나왔었다.
1. 네그로니(빌드)
2. 마이타이(블렌드)
3. 브랜디알렉산더(쉐이킹)
현업에서 어떤 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제빙기, 시럽, 블렌더, 가니쉬 등 각종 기물의 위치를 알고 있을 때 7분에 3개 칵테일은 전혀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오히려 종류에 따라서는 차고 넘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빌드만 해야 하는 칵테일이 3개라던지...)
하지만 모든 게 익숙치 않은 공간에서 내가 사용했거나 학원에서 배웠던 각종 시럽병과, 술병의 모양이 다르다면 현장에서 7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닐 수 있었다. 술이 어느 병에 담겨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7분 중에 2~3분은 병을 찾는 데 날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나 역시 병을 찾고, 가니쉬(넛맥가루)를 못 찾아서 넛맥가루가 어딨는지 물어보고서야 칵테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넛맥가루는 작은 공병에 옮겨담아놔서 쉽사리 찾아지지가 않았다)
물론 시험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제한된 시간 내에 '평가'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항임은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조주기능사 자격을 통해 습득한 40개 가량의 레시피와 실기시험만으로 절대 현업에서 일하는 건 불가능하다라는 점이었다.
대학생 때 1년정도 칵테일 바에서 전담 바텐더로 일했기 때문에 레시피는 (물론 조주기능사 레시피와는 달랐지만 들어가는 종류는 알고 있으니) 이미 숙지하고 있었고, 각종 기물사용법, 계량법 등도 숙지가 된 상태였다. 지금도 가게에는 바 스테이션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고, 여러 종류의 칵테일들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각종 바 기물들은 손에 익숙하기도 하고, 술 종류나 시럽, 가니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처음 실기를 치는 사람이 학원이나 독학으로 칵테일을 만들어보고 실기시험에 합격했다면, 맛을 비롯해 (이 맛이 과연 맞는 맛인지) 고객에게 서빙되기 전까지 신경써야 할 내용들, 가니쉬, 서비스 등 조주기능사에서 시험만으로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7분이라는 시험시간의 대부분을 단순히 각종 재료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쏟아야 할 뿐더러, 용량과 맛, 가니쉬의 상태는 신경쓰지 않는 시험이 과연 현업에서 실효성이 있냐 했을 때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이래서 많은 현업 종사자들이 크게 이 자격증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 막상 발을 담궈보고서야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시험은 합격했지만 조주기능사라는 시험이 정작 현업에서 필요하냐 했을 때 현업에서 '바텐더'로 일을 하기에 필요한 자격증은 아님이 분명하다. 다만 칵테일이나 위스키, 와인과 같이 술에 관심이 있고, 이러한 관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혹은 호텔이나 관공서 등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업무지원 요건으로 필요로 하는 곳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격증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조금 더 국가적 차원에서 서비스업과 Hospitality업의 한 갈래로 바텐더를 양성하고자 한다면 그 공부 및 평가과정에서 많은 개선들이 이뤄져야 할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이 분야가 마이너할 수도 있어서 양성까지 하면서 키울 분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다만 국가차원에서 인증을 하는 자격증인만큼, 그 수준을 상향평준화 시킬 필요는 있지 않나 싶어 아쉬운 마음이 남는 건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