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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iza Feb 16. 2024

08. 갑자기 분위기 현실주의자

 나는 자타공인 낭만주의자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돈 부동산 주식 코인 등등 여러 가지로 재산을 늘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보며 현실적이네 저것이... 어른의 삶?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주변에서 재테크와 거리가 가장 먼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 흔한 주식 계좌 하나 없다. 절약보다는 배움의 가치를 높게 보는 사람이었다. 당장 박봉이어도 갈수록 호봉이 오르는 직장에 다니기도 해서, 체력과 시간이 될 때 많은 것들을 배워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노후준비에 대해 (연금이 나오는 만큼) 다른 직장인들보다는 안일하게 생각한 것도 컸다. 첫 월급이 116만원인 충격적인 박봉에도 배우고 싶은 건 다 배워봤던 것 같다. (경제학도 배웠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의 관심사는 대개 문학과 예술에 머물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창 땡길 시기에 버킷리스트를 청산하겠다며 돈 벌기를 그만 두었다. 갑자기 아프리카로 봉사를 오겠다고 직장생활을 멈추고 이역만리로 훌쩍 떠나온 것이다.     




 재테크에 열심인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그런 말이 있다. ‘부자는 가만히 있어도 자산이 늘어나고, 중산층은 가만히 있으면 자산이 유지되고, 서민은 가만히 있으면 자산이 줄어든다.’ 떠나기 전에도 자산은커녕 마이너스인 사람이었다. 내가 한국을 비운 새 나의 자산은 내가 서민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노동소득이 주 소득이면 당연한 사실인데도 그간 내가 생각 없이 살아온 것 같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돌아가면 한동안 연금이 두 배로 소거된 월급을 받을 것이다. 사실 여기 올 때까진 전혀 계산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이걸 이제야 생각하다니 골머리가 아팠다. 나는 성인이고 스스로의 경영자인데! 참 철이 없었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난 글을 마지막으로, 뭔가를 더 쓰고 싶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일전엔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살았고 그에 어울리는 신념이 삶의 중심에 있었다. 불안을 다루는 일이 어렵지 않았고,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 스스로를 옳다고 믿어왔으며 주변에 사람이 없어도 크게 휘둘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의 생활은 달랐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전에도 이따금 무기력에 잠기긴 했지만 스스로를 미워하는 건 오랜만이었고, 그 마음을 멈출 방법이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그 미움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그 와중에 자기를 자책하자니 끊임없는 도르마무로 여태의 삶을 잘못 산 것 같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 와중에도 자기불안을 운영해본 n년차 경력자로서, 스스로를 건져내는 루틴은 여전히 유효했다. 이래서 나이듦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의 재정은 초라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워낙 박봉인 직업이고 겸직과 부업이 허용되지 않으니 어렵지 않은 예측이다.) 다만 내게는 죽을 때 떠올릴 순간이 많을 것 같다. 이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돈 많이 모은 30대의 평범한 직장인보다, 돈이 없어도 이 나이쯤엔 아프리카나 남미의 어딘가에 오래 다녀온, 배움이 많은 사람이고 싶었다. 결국 살고 싶은 대로 산 건데 왜 자꾸 자책을 해? 거기서 비로소 계속 돌던 도르마무가 멈췄다. 어린 시절의 나는 하고 싶은 걸 어지간하면 다 해본 것 같다. 체력이 될 때 많은 걸 배워볼 수 있는 건 좋은 기회였다.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고 여러 번의 수술도 받았다. 어린 시절의 건강과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기도 하기에, 그때의 내가 경솔했다는 생각은 그만 두기로 했다. 다만 미래의 내가 빈곤한 노인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으므로, 한국에 돌아가면 몇 년 정도는 어린 시절의 내가 미뤄둔 책임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할 생각은 아마도 꾸역꾸역 스스로를 키웠다는 생각일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보호자였고 앞으로도 그렇겠구나. 여기까지 생각하니 좀 먹먹해졌다. 노인이 된 나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제 어린 시절 스스로의 보호자 역할을 마치고 미래의 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기도 했다. 이래서 허리세대가 고생이구나. 지금의 나는 누가 돌봐주나! 웃퍼지기도 한다.  

    

 다만 여전히 나는 알고 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한 것처럼, 한 사람이 자라는 데는 이따금 그 이의 모든 생애가 필요하기도 하다는 걸. 갑자기 현실주의자로 한동안 살아야한다니 마음이 좀 답답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그게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는 걸. 현실감을 겸비한 낭만주의자로 살 수 있을까? 그 둘이 상충하는 개념은 아닌데, 함께 가기 어렵게만 느껴지는 걸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싶기도 하다.      


 이십대에서 삼십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나면, 삶에서 눈에 띄는 성취를 할 기회는 평범한 사람인 이상 많지 않다. 성취의 시기가 끝나면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해 안정적인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아프리카에 오기 직전과, 오고 나서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 중 대부분이 결혼을 했다. 대개의 내 친구들이 결혼을 선택한 이유 역시 안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결혼생각은 없지만 안정에 대한 욕구가 없는 건 아니어서, 미래의 내가 어떻게 하면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을 지를 덩달아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낭만주의자지만, 한동안 현실주의자로 살기로 했다. 미래의 내 낭만을 끌어 쓰는 청춘의 시기는 이제 슬슬 저물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게 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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