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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iza Jun 19. 2024

09. 감자국 표류기

물조아맨의 험난한 내륙국 생활

감자국이라는 표현은 나의 것이 아니지만, 여기서 10개월 가까이 지내면서 이보다 적확한 표현을 찾지 못해 원작자의 동의를 받고 빌려왔음을 밝혀둔다.

이 나라는 감자 외에 내세울 게 없다. 과일이라고는 달랑 수박과 파인애플 뿐이다.

비난 아니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실화이며, 사실이 정말 그러하다.

이 나라 사람들의 주식이기도 하고, 다른 곳과 비교해서 강점인 작물이 감자이기도 하다. 감자는 맛있다.

문제는 감자만 맛있다.

누구나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로 이어지는 노래를 알 텐데, 여기서는 감자는 맛있어 다음에 노래가 끝난다.

더불어 나는 스스로가 미식가라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여기 와서 미슐랭 바이브의 재능을 새로이 발견한 몇 안 되는 한국인이 되었다.


와중에 나라사랑 동기사랑의 아이콘인 우리 기수는 매일은 아녀도 상당히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데, 사람 넷 중 셋이 탄자니아로 떠났다 왔거나, 오는 중이거나, 올 예정이다.

막차인 내 차례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동기들의 다정함 덕에 살짝 찍먹 정도는 하고 왔다,

동기 샘의 상태메세지에 감자국 주민들에게 잔지바르란, 이라는 문장이 떴는데 그게 너무 웃기고 또 해방감이 들기도 했다.

평소 워낙 적극적인 표현을 하지 않는 분이었어서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참고로 동기들 중에서도 나는 이 나라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말년을 앞두고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모이는데 책임을 조금은 통감했다!

각자의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가 힘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그걸 자기의 방식대로 잘 견디고 계셨구나 싶어서 뭉클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한 계절에 한 번은 바다를 보고 왔다. 그때는 그게 그냥 좋아해서였는데, 한 국가의 존속에 바다가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바다는 단순히 감성의 영역이 아니다.

심지어 얼마 전엔 불쌍한 몽골 ㅠ.ㅠ 이란 맥락의 유튜브 영상을 굉장히 인상 깊게 보았다. 왜 여전히 이 나라 물류에 답이 없는 지를 또 생각했고, 유독 나와 맞지 않는 것 같고 왜 그렇게까지 힘들게 느껴졌는 지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주 오래 다음 글을 쓰고 싶었지만, 이전의 이야기들이 자주 어둡게 흐르는 바람에 환기보다는 침잠에 가까운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어쨌거나 결국 나는 이기적인 쓰기를 지향한다. 결국 뭔가를 쓸 때는 내가 재미 있거나, 기억하기에 좋자고 쓸 때가 확실히 더 많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꽤나 오래된 방어기제구나 싶기도 하고!

논리를 좀 더 깎아내거나 덧붙이는 습성은 뭔가를 자주, 많이 파는 습관에 큰 도움이 되었어서 이제 미워하진 않는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요즘의 스탯은 그래도 한국을 떠날 때의 수준은 되는 것 같아서 자주 마음이 놓인다.


요즘엔 날이 좋아서 자주 기분이 좋다. 그런지 한 두 달쯤 다 되어 간다.

두 달쯤 되니 조금 더 안심이 된다. 뭔가를 매사 좋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온건한 사회생활에 대한 양가감정이 여전히 든다.


이 곳의 사람들은 이 나라를 아주 좋아한다. 다시 오는 사람들도, 나라의 규모에 비해 눌러 앉는 분들도 적지 않다.

낙관적인 건지, 왜 저렇게 다들 뜻이 큰 건지 왜 나만 비관적인 지를 고민하며 꽤 오래 헤맸다.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댈 구석인 종교가 있음을 자주 잊었다.

다행히도 비가 멈추면서 저런 비관도 점차 잦아들었다! 여기 와서 비로소 맨 정신으로 생각할 기회가 생겼다.

비가 오지 않는 기간 동안 스스로의 멘탈을 정비하며 다음 우기를 준비해야지!


나는 거짓말을 정말 못하는 편이지만, 솔직히 기록해두자면 여기서는 어느 정도 타협의 옵션을 선택했다.

오늘 본 유시민 작가님 유튜브 영상에서는 본인도 그러신다고 한다. 유시민 작가님 같은 센 사람 (작가님 피셜 표현임) 도 그렇게 산다는데 내가 뭐라고 싶어서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종교가 없는 이에게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여전히 타협할 수 없는 종교나 신념의 이슈에는 제법 날을 세우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지금은 크다.


이 나라를 사랑하려는 마음은 지난 달에 인터넷 사태와 기관장과의 맞다이를 지나며 겨우 접었다.

사실 그런 되도 않는 사랑은 아집에 가까울 확률이 높은데, 그게 고집인 지도 모르고 오래도 버텼다.

그 사랑을 포기하니까 너무 기하급수적으로 행복지수가 상승하더라.

내 사랑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뭐 얼마나 대단한 세기의 사랑을 하겠다고 잡고 있었는지 허무했다.

아무튼 사랑을 포기한 대신 내적 평화를 손에 넣었고, 한 달 이상 지난 지금도 여기 와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에필로그로 덧붙이자면, 감자국 주민들에게 온전한 행복은 결국 오지 않았다.

탄자니아에 다녀온 분들도 끝내 소망하던 맛있는 해산물 요리는 결국 만나지 못하셨다는 비보를 전하셨기에.

그럼에도 모두가 행복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적는다.

광활한 초원과 아름다운 인도양은 협소한 선택지만이 주어지던 감자국 주민들에게 큰 기쁨이었다.

감자국이 왜 감자국이겠어. 가서 다른 걸 고를 수 있다는 것조차 감동일 것이기에, 너무나도 공감되는 해방감이었다.

감자 외의 다른 선택지, 탁 트인 공간감, 갇혀 있지 않다는 오랜만의 감각을 얼른 만나고 싶다.

과연 도망친 곳에 낙원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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