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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an 09. 2024

4. 미세먼지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내 날씨가 화창하다가 오랜만에 비가 오던 일리노이 샴페인. 그 날 오후 친구와 눈물의 대화를 나누었다. 발치서 내가 멋지게 유학생활을 잘 해내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친구는, 나의 깊은 슬픔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도 처음으로 남편과 떨어져서, 한국에서 온 친구와 시간을 보내던 이 때가 참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무관에서 서기관 승진을 목전에 두고 박사유학이라는 자충수를 두는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역시 참 자기 살고 싶은대로 사는구나 멋지다!!'라고 응원해주었었다. 1년만 기다려서 승진하고 나가라는 선배들의 만류도 있었지만, 그 때의 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공부를 하고 싶단 생각이 너무 강했다.


그리고 나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고스란히 치루었다. 거의 폐지 직전에 놓여 있던 로스쿨 PhD과정은 학생들을 완전히 방치하고 있었다. PhD 학생들은 어색하게 JD 학생(변호사준비를 하는 일반 로스쿨학생)과 비슷한 삶을 살거나, 다른 학과 교수님에게 빌붙어서(?) 배움을 얻어야 했다.


난 JD 학생과 비슷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수업을 15학점씩 들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PhD 학생인 나는 멘토링, 인턴십 박람회, 네트워킹 파티 등등에서 매번 '넌 여기서 뭐하는거니?' 취급을 받았다.


그나마 초반에 내게 애정을 보이며 열심히 지도를 하시려던 지도교수님은 코비드가 시작된 후 공원에서 모임을 갖자고 하시더니, 어느 날 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멈출 수 없다며 고백을 하셨다. 이 사건은 내게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나의 가능성을 유일하게 알아봐 준 사람이 사실은 다른 데에 관심이 있었다니... 자신감은 더더욱 곤두박질쳤다. 이 일이 있고, 한 달 후에 남편을 처음 만났다.


돈을 조달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1년 학비가 6,000만원인데 풀브라이트는 5,000만원 정도밖에 지원이 안되었기에 남은 학비와 생활비, 월세 등은 내가 어떻게든 충당을 해야 했다. 그나마 3년차부턴 지원금이 0원이었다. 공무원 신분으로 겸직허가를 받을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어서, 학교에서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을 최대한 받아내기 위해 가난을 입증하는 지원서를 쓰고, 이런저런 연구용역에 참여해 돈을 벌었다. 수많는 교내 연구조교, 강의조교에 지원했다. 20번도 넘게 고배를 마셨다.


나는 항상 한국을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 로스쿨과 워싱턴 주의 법조계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나는 내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야지. 남편의 반대만 없다면 더 이상 휴직을 연장하지 않고 공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던 중  박사 3년차에 갑작스레 귀인을 만나게 되었다. 컴퓨터 사이언스 학과의 교수님이 내 연구분야에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이다. 학과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내 학비를 전액 지원해주시고 내 연구를 함께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겠다고 했다.  같은 제안이었다.


내가 미국 생활에 적응하길 바랐던 남편은 뛸듯이 기뻐했다.


드디어! 드디어! 당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났구나! 내가 뭐랬어!!



슬프게도 남편이 내 커리어를 응원해주는 따뜻한 모습이 곱게만 보이진 않았다. 그는 내가 미국에 정을 붙일 수만 있다면 무슨 이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참 슬픈 일이다.


남편에 대한 불신과는 별개로 그 교수님이 내게 해주신 제안은 너무나 파격적이었고 ("아무 의무 없이, 네가 하던 공부만 계속 한다면 학비와 생활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교수님의 인품도 너무 좋으셨다.


나는 '한 번 더... 노력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만 그 교수님의 학생이 되어 공부를 하더라도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단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난 3년간 법학계의 글쓰기는 많이 익혔지만, 컴퓨터사이언스 컨퍼런스식 글쓰기는 새로 익혀야 했다. 내가 훈련을 받아 온 법학 방법론이 얼마나 유용할지도 의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인공지능 법과 윤리를 다루는, 멋진 학제간 연구자가 되고 싶었지만 이를 위해선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기회가 너무 늦게 찾아왔던 것이다. 내가 미국 체류를 계획했던 3년 중 2년 8개월쯤 되었을 때 그 교수님을 만났으니. 심신이 지쳐있던 난, 이 기회를 잡아야할지 말아야할지 깊은 고민을 했다. 동기들은 이미 모두 승진을 한 상태였다. 지금 돌아가도 3-4년 후배들과 함께 승진을 하게 될 터였다.






친구는 말했다.  


"너 그냥 복직해야 겠다. 사람이 이 정도로 힘들면, 진짜 안되는 것 같아. 너 공무원 생활할 때 지쳐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감이 있어 보였어. 활력있게 일하는 것 같았다고. 어떻게 이룬건데. 그 커리어를 다 버릴 만큼 네가 학계에 꿈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뭘 위해서 그렇게 자기를 깎아먹고 있는거야...?"


나는 횡설수설 말을 이어갔다.


"나도 이젠 헷갈려. 어디까지가 내가 원했던 거고, 어디까지가 남편이 원하는 건지.

...

남편 말도 맞아. 내가 인공지능법이랑 표현의 자유를 연구하려면 미국에 있는게 기회가 더 많을 수도 있어. 하지만 난 더 이상 어리지가 않고, 그 기회를 누릴 만큼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

컴퓨터 사이언스 학과 교수님이 주시는 기회가 2년 전, 아니 1년 전에만 왔었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

확실한 건 결혼하지 않았다면 한국에 돌아갔을 거라는 거야.

...

난 원거리도 좋은데, 남편은 그건 죽어도 싫다네. 휴...

...

남편은 한국 게임 업계에 들어가서 혹사 당하는 게 너무 버겁고, 한국 회식 문화 때문에 내가 저녁 없는 삶을 사는 게 싫고, 비염이 심해서 미세먼지가 있는 곳으로 이사가는 게 무섭대. 한국의 교통체증도 싫고. 시부모님이랑 가까이 살면 자꾸 싸울 것 같대. 나도 미국이 싫지만, 남편은 그것보다 10배쯤은 한국을 싫어해."



이 쯤 들었을 때 친구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친구: 미세먼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 응?

친구: 진짜 못 들어주겠네. 그래, 네가 한국에서의 커리어를 포기하는 만큼 남편도 한국에 간다면 미국에서의 커리어를 포기해야겠지. 그게 싫은 건 알겠는데. 뭐, 미세먼지? 교통체증?그런 건 진짜 사소한 거야. 그 정도는 너한테 맞추기 위해 감수할 수 있어야지. 둘 중 한 명은 자기를 희생해야 하는 상황인데, 진짜 크리티컬한 요인만 가지고 둘이 대화를 나눠야지 미세먼지 때문에 비염 심해져서 못 가겠다 이건, 아닌 것 같애. 그냥 너 죄책감 주려고 있는 이유, 없는 이유 다 갖다붙이는 것 같은데.....

나: 그런가..?

친구: 응, 네가 여기에서 느끼는 불행이 남편의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아서 난 좀 슬프다. 서로 얼마나 감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애.




가끔 유튜브에서 해맑게 대학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캠퍼스에서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에게 햇빛 같은 인사를 건네며 새로운 사회를 온 몸으로 흡수하는 사람들. 2019년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에게 저 행복이 수년동안 지속되기를 바라게 된다.



미국에서 난 왜 이렇게 불행했을까.


지도교수 복이 더럽게 없었기 때문일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일까.

우리 학과에 자원이 너무 없어서였을까.

크고 작은 인종차별을 당해서였을까.

언어장벽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나의 목표가 너무 높았던걸까.



남편에게 미국은 친절하고 편견없는 사회, 그에게 천금의 기회를 준 사회였다. 내게 미국은 처음에는 다정했지만 나중에는 아무리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내가 내민 손을 밀쳐내는 곳이었다. 그는 한국에 두고 온 것이 없었고, 나는 한국에 두고 온 것이 많았다.


친구가 나지막히 이야기했다.

"너희 남편은 이렇게 둘이 해결할 게 많은데 당장 아이가 갖고 싶다는거야? 남자들은... 기분만 낸다는 말이 맞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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